‘나리’가 된 日 제국대학 유학생들… 해방 뒤 ‘南北 엘리트’로

- 제국대학의 조센징 /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10년동안 졸업생 784명 추적
그중 339명의 인생경로 담아

대부분은 출셋길 선택했지만
일부는 항일투쟁 참여하기도

도덕적 관점서 ‘惡’ 규정 대신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역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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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세운 제국대학은 모두 9곳, 일본에 도쿄(東京)·교토(京都)·도호쿠(東北)·규슈(九州)·홋카이도(北海道)·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 등 7곳, 강점한 조선 경성과 대만에 2곳을 두었다. 1886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구상에 따라 독일 대학을 본떠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천황제와 결부된 국가대학”으로, 출세를 미끼 삼아 시험으로 선발한 “제도 통과형 수재”를 서양식 근대 학문 지식을 갖춘 국가인재로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1909년 도쿄제대 졸업생의 68%가 관료·교원 등 ‘관’ 분야에 종사한 데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정종현 인하대 교수가 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연구에서 시작해 지난 10년 동안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졸업생은 모두 784명, 항일투쟁·가정 사정 등으로 중도에 학업을 중단한 경우 등까지 합치면 모두 10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저자는 그중 도쿄제대, 교토제대 출신 졸업생 339명의 인생 경로를 해방 이후까지 면밀히 살폈다. 이로써 우리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남북한 엘리트 지식인들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게 됐다.

한국 재벌의 기원인 경성방적의 김연수, 그 아들 김상협 국무총리,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인 윤일선 서울대 총장, 조좌호 성균관대 총장, 고병국 경희대 총장, 이인기 영남대 총장, 친일파 민영휘의 증손으로 풍문여고 설립자이자 하이트맥주 사장 민덕기, 각각 남북한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유진오와 최용달, 남북한 과학계의 태두인 이태규·리승기·우장춘, 작가 김사량·이효석, 국어학자 최현배, 사회학자 이만갑….

이들이 모두 제국대학 출신자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책에 나오는 시쳇말이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자본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은 없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통해 우정을 쌓고 수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공유하면서 지도자 의식을 길러온 제국대학 출신자들의 강한 유대감이야말로, 각각의 재능과 실력에 덧대어져 이들의 출셋길을 열었다.

제목은 이들의 복잡한 심사를 암시한다. 한편으로 이들은 입학과 동시에 조선의 ‘나리’가 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식민지인으로 차별당할 수밖에 없는 ‘조센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박영출, 박화영, 송몽규처럼 제국대학을 다니다 항일투쟁에 참여해 목숨을 잃거나 최현배 등처럼 옥고를 치른 이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실력양성론’ 또는 ‘동족을 위한 출세’라는 미명으로 출셋길을 선택했다. 졸업생 중 80% 정도가 관료가 되는 지름길로 법학부 등 인문 계열을 전공한 것은 입신을 꿈꾸었던 이들의 속마음을 잘 드러낸다.

1906년 조선인 출신으로는 도쿄제대를 첫 번째로 졸업한 후 대한제국에서 관리로 일하다 총독부 관리로 변신한 상호의 일생은 후배들의 운명을 상징해서 보여준다. 식민 체제는 제국대학 조선인 입학생들의 민족적 열정을 제압해서 일제 협력자로 길들였던 것이다.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 행정·사법 양과에 합격하고도 임관을 거부하고 학자의 길을 걸은 고병국 서울법대 초대 학장 같은 인물은 소수였다. 그보다는 3·1운동으로 징역을 살았지만 나중에 총독부 보안과장으로 변절한 한종건, 2·8 독립선언 주역에서 내선일체의 첨병으로 변신한 서춘 등이 이들의 삶을 압축한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은 제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환각”에 빠졌고, 많은 사람이 총독부 관리로 동족에 대한 징용·징병·공출에 앞장서고, 법정에서 독립운동가를 심판했던 것이다.

이들 중 해방 이후 민족 앞에서 식민지 경력에 대한 진심 어린 참회를 보여준 이는 이항녕 정도다. 사사오입 개헌에 앞장선 최순주와 이재학,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내무부 장관 장경근,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대법관 변옥주 등처럼 국가건설을 위한 인재에 목말랐던 현실을 틈타 영달 우선의 처신을 이어갔다. 엘리트 지위를 대물림하기도 했다. 본가·외가·처가가 모두 제국대학-고등문관시험-식민지관료 코스를 밟았던 이회창, 아버지가 총독부 판사였던 이수성 두 전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는 이들이 “좋은 배경을 타고난 것”은 잘못은 아니지만, “그 역사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준엄하게 말한다.

제국대학 졸업생은 1910년대 31명, 1920년대 250명, 1930년대 376명으로 늘어났다. 이 중에는 독립운동가로 남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된 신의경, 농학자 김삼순, 북한의 문화예술을 쥐락펴락한 신진순 등 여성도 10명 있다. 제국대학 졸업자들은 해방 이전에는 “총독부 식민통치를 유지하는 관료의 수급처”였고 해방 이후에는 “남북한 국가건설의 인적 자원”이었다. 남북한 양쪽 모두의 지배 엘리트로 이들은 언론·출판·교육·학술·정치·경제 등 전 분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남한 헌법을 기초한 전문위원 10명 중 6명이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학술원의 81%, 1954년 결성된 대한민국 학술원 초대 회원 62명 중 39명이 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서울대와 김일성대의 주요 교수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제국대학 출신 대부분이 “일본 제국-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적 관점”에 서서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본질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이며, “일본 식민주의의 진정한 청산”을 위해 우선해야 할 일은 “제국대학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역사화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자료가 스스로 말하게 하는 이런 책은 본래 훌륭하지만, 저자의 글솜씨가 더해져 읽는 즐거움까지 준다. ‘올해의 책’이 될 만하다. 392쪽, 2만 원.

장은수·이성과감성콘텐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