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at >권력 편승하며 정치단체 변질… 文정부선 ‘만사참통’ 얘기까지

■ 정권과 유착… 빛 바래는 ‘시민운동’

DJ정부 113명·盧정부 158명 공직 진출… 親與단체 내달 총선 앞두고 창당도
권력견제·시장감시는커녕 “利害관계만 집착 또 하나의 권력집단” 비판

“시민운동이 권력에 편승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민운동이 아니다.”

요즘 언론 기사나 각종 논평에 실렸다고 해도 설득력이 있을 법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 글은 무려 14년 전인 2006년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왕혜숙 박사와 함께 쓴 자유기업원의 ‘참여연대 보고서’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해당 보고서가 나온 뒤 14년 동안 한국 시민사회는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반면 류 교수가 지적했던 권력과의 유착 현상, 단체 내부를 파고든 당파성·진영 논리 역시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 이들은 보고서에서 “권력을 견제하고 시장을 감시하는 시민운동 본래의 순수한 모습이 지켜질 때 국민은 시민운동에 적극 공감하게 된다”며 “이런 맥락에서 시민운동이 정치에 참여해 정책적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발상은 시민운동이 경제활동에 참여해 돈벌이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자가당착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정권에 기용됐다 각종 비리로 낙마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등 익숙한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 스스로를 무색하게 하는 내용이다. 또 이번 정부 들어 권력 견제의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참여연대에 대해 ‘만사참통’(萬事參通·모든 일은 ‘참여연대’로 통한다는 비유)이라는 풍자도 나왔다.

◇민주화 이후 권력 내부 진입 = 한국 시민운동의 출발은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변화한 시대적 현실에 맞춰 등장한 시민운동은 기존 재야·민중운동과 비교할 때 △합법적 △비폭력적 △대안 중심의 운동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의 공명선거 감시활동,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의 환경보호 활동도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란 이름으로 창립된 참여연대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교량 역할을 강조했다. 참여연대 등 전국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2000년 총선 낙선운동은 시민운동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현실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한 선례로도 꼽힌다.

이후 시민단체 출신이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발탁된 시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부터다. 당시 류 교수 등의 ‘참여연대 보고서’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때 113명, 노무현 정부 때 158명의 참여연대 출신 인사가 공직에 진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인재 영입 외에도 참여연대가 내놓은 ‘입법·정책 개혁과제’ 보고서에 담긴 내용 상당수가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반영됐다.

보수 정권에서도 시민단체 출신들의 정·관계 입성은 이어졌다. 한때 경실련 정책위원장을 지내기도 한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 국회의원을 거쳐, 이명박 정부에서는 청와대 비서관·고용노동부 장관·기획재정부 장관을 두루 거쳤다. 보수성향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실장 출신인 전희경 통합당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 시절 20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했다.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이 같은 인적·화학적 결합을 거듭하면서 결국 시민단체가 정치단체로 변질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급기야 오는 4·15 총선을 앞두고선 아예 친여 성향 일부 시민단체가 창당에까지 나서고 있다. 비례연합정당 ‘정치개혁연합’ 출범을 주도한 주권자전국회의가 그 주인공이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촛불혁명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만들어진 이 단체는 적폐청산·국가 대개혁을 표방하며 최근까지 서울 도심에서 촛불집회를 열어 왔다.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 원로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함세웅 신부, 문국주 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이사장 등이 구성원이다.

◇‘조국’이 쏘아 올린 작은 공 = 지난해 조 전 장관 임명은 한국 시민운동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됐다. “우스갯소리지만, 정교모 설립자는 조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조 전 장관 사태를 계기로 결성된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정교모) 창립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관계자의 말이다. 이들은 조 전 장관이 물러난 뒤에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등에 반대해 왔고, 지난달엔 ‘자유시민운동’을 선언하는 등 본격적인 시민운동으로 나아갈 채비를 마쳤다. 이 관계자는 “연구실의 교수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 이유는 조 전 장관의 임명으로 사회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라며 “보수와 진보가 아닌 거짓과 진실의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조 전 장관 사태를 계기로 보수 진영에선 정교모 등 새로운 시민운동이 태동한 반면, 진보 진영에서는 권력과 유착한 시민단체의 현실을 고발하는 내부 비판이 줄을 이었다. 조 전 장관의 ‘친정’격인 참여연대가 조 전 장관과 그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에 침묵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지난해 9월 김경율 전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이 조 전 장관과 진보 진영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리자 참여연대 측은 김 전 위원장을 징계위원회에 넘겼다가 징계 없이 사임 처리했다. 그는 지난 1월 국회 강연에서 “시민단체와 권력 간에 이권을 매개로 나눠 먹기가 이뤄지다 보니 도저히 분간이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같은 단체의 조혜경 전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도 지난해 10월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조국 사태를 통해 참여연대는 25년 역사에 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겼다. 참여연대가 관변 시민단체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자초한 것에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참여연대를 떠났다.

◇시민사회단체 변질의 피해자는 시민 = 이 같은 변질과 굴곡 속에 주요 시민단체의 목소리는 이제 사회에 대한 울림이 없는 공허한 주장으로 치부되고 있다. 지난 1960년 4·19 혁명을 비롯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1990년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등에서 큰 역할을 한 게 현존 시민사회운동의 선배 격인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었다. 당시 사회의 최고 지식층인 교수들이 들고일어나니 국민도 ‘정권에 문제가 있구나’ 하고 동조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수천 명의 교수가 시국선언을 해도 국민은 별달리 주목하지 않는다. 이는 문민정부 이후 ‘폴리페서’(정치·정권에 적극 참여하는 교수)가 등장하고, 정치에 물든 폴리페서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하다 보니 기성 정치인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과의 동조 현상이 급격히 이뤄진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이제 도매금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진보·보수 진영에서 큰 활동을 해온 참여연대나 바른사회시민회의 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민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 명약관화하다. 언론과 함께 권력 감시·견제의 중요한 축인 동시에 사회 개혁의 전위부대며 권력 소외계층의 안전망인 시민단체의 퇴색은 결국 일반 시민의 권리 보장과 인권 보호 약화라는 피해로 이어진다.

◇당파성 타파, 자생력 확보가 활로 =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진보 시민단체는 당파성이나 진영 논리에 매몰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보수 시민단체는 각종 후원·지원이 끊겨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이다. 임헌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사무총장은 19일 통화에서 “내부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고 당파성에 휩쓸리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며 “진영 논리가 아니라 명확한 가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입장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 교수는 보수 단체들에 대해 “최근엔 태극기집회나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예전보다는 자생력을 갖춘 모습이 감지되지만, 아직 역량을 비축한 것 같진 않다”며 “자생력을 갖추면서도 정치권력에 대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