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쾌유 청하는 기도’ 같은 연주에… 관객들 기립박수 화답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백건우가 연주를 마친 후 커튼콜을 하며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백건우 예술의전당 공연

슈만 ‘유령변주곡’ 등 7곡
등퇴장 반복… 커튼콜만 4번
“수묵화처럼 담백한 해석” 評

지난 12일 오후 9시 15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연주를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퇴장한 피아니스트 백건우(75)가 객석의 박수갈채에 다시 무대로 나오자 관객들이 하나둘 기립했다. 등퇴장을 반복하는 ‘커튼콜’을 네 번째 했을 땐 관객의 절반 이상이 일어나 있었다.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아내를 둘러싼 가정사의 아픔을 예술로 치유한 백건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객석에 화답했다.

올해 데뷔 65주년을 맞은 그는 이날 독주회에서 독일 작곡가 슈만(1810~1856)의 첫 작품 ‘아베크 변주곡’부터 마지막 작품인 ‘유령 변주곡’까지 총 7곡을 연주했다. 건반의 양극단을 오가는 경쾌한 초기작과 정신분열 증세가 반영된 어두운 후기곡을 번갈아 들려줬다. 유작인 ‘유령 변주곡’은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854년 꿈에서 들은 음악을 써내려간 작품이다. 이 곡을 쓸 당시 슈만은 라인강에 뛰어들었다가 구조되는 등 극심한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날 한 칸 띄어 앉기 지침에 따라 오픈된 약 1200석은 매진됐으나 남편의 연주회마다 객석의 맨 뒷자리를 지키던 아내 윤정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백건우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고개 숙인 채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스승의 딸 클라라와 꿈같은 결혼 생활을 즐기다 건강 이상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슈만을 기억하며 아내를 설핏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날 연주에 이어 14일엔 같은 장소에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벨러 버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등을 선보였다.

공연을 관람한 클래식 전문가들은 백건우의 섬세한 연주와 곡 해석에 한목소리로 찬사를 보냈다. 피아니스트인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유령 변주곡’을 비롯해 ‘새벽의 노래’ ‘세 개의 환상작품집’ 등 정신분열 징후가 드러나는 곡에 대한 백건우의 해석은 수묵화처럼 담담하고 담백했다”며 “인위적으로 몰아치는 대신 화해의 여지를 남기는 연주의 경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14일 연주된 피아노 협주곡은 버르토크가 병으로 죽어가면서 아내의 생계를 위해 작곡한 음악”이라며 “12일과 14일 공연 레퍼토리는 공교롭게도 백건우의 가정사와 겹치며 아내의 쾌유를 청하는 한 예술가의 기도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장일범 음악평론가는 “작은 음(音)을 섬세히 연주하는 ‘피아니시모’는 제대로 세공된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백건우의 ‘필살기’였다”며 “아무런 방해 없이 슈만의 생애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이라고 전했다.

지난달 중순 귀국 후 약 3주에 걸친 전국 투어를 마무리한 백건우는 곧 프랑스로 돌아간 뒤 오는 10월 27일 런던필하모닉과의 협연 공연에 맞춰 다시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7월로 계획된 ‘모차르트 프로젝트’ 공연은 여러 사정상 취소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라고 소속사 빈체로는 전했다. 앞서 백건우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방치했다는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방치 의혹을 제기한 윤정희의 동생들은 프랑스에 이어 최근 한국에서도 후견인 지위 소송을 제기하면서 양측의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