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권력 독주하고 야당은 제역할 못해…‘헌법 존중’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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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왜 지금 헌법인가 - 석학 3인 좌담

- 내분사회 ‘내전급 대선’ 우려
“文정부, 정의·공정을 레토릭으로 활용… 유례 없는 대립구도”
“정권 초부터 적폐청산 등 의도적 갈등 극화… 결국 사회 두쪽”

- 민주화 이후 34년 현주소
“촛불시위를 혁명으로 잘못 해석… 견제·균형 없는 ‘다수’ 독주”
“‘우린 정통성 있다’ 상대 찍어내… 이토록 극렬한 정권 못봤다”

- 헌법 정신이란 무엇인가
“헌법 잘못돼 제왕적 대통령 맞은 건 아냐… ‘나눔의 미학’필요”
“정당간 견제·균형 무너져…대통령 권력 강하면 3권분립도 붕괴”
“총리, 헌법상 역할 큰데 지금은 얼굴마담… 대통령 권력 나눠야”

- 국민은 어떻게 해야하나
“대립적 소용돌이가 심층구조 은폐… 정치권의 레토릭 간파해야”


<좌담 참석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성낙인 서울대 명예교수,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사회 = 오남석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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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문화일보 창간 30년 특집 기획 ‘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 도입 좌담회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성낙인 서울대 명예교수,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는 진영 갈등과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한 결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존중하는 최소한의 공통분모조차 실종됐다고 개탄했다. 각각 국내에서 정치학과 법학,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이들 석학은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넘어서기 위한 권력 나눔과 협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공화국’을 근간으로 한 헌법 정신이 우리 사회의 중심축을 복원하는 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좌담회는 지난 4월 23일 오후 문화일보 편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안전 수칙을 준수해 진행했다.

△사회 = 우리 사회가 심각한 진영 갈등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약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20대 대통령선거가 ‘내전(內戰)급 대선’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 10년 전이나 5년 전에 비해 지금은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대립 구도가 강해졌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현 정권이 처음부터 갈등을 극화시켜 혁신을 이루겠다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표적인 것이 ‘적폐 청산’이다. 적폐라는 말 속에 적의가 들어 있다. 화합과 거리가 멀다. 요컨대, 이 정권이 처음부터 외쳤던 구호 속에 대립 구도 극화라는 씨앗이 숨어 있었고, 지금 우리가 지켜보는 현상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 한국의 정치·사회 갈등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화하고 갈등 강도가 격렬한 것은 촛불 시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촛불 시위를 ‘혁명’으로 정의하고 이를 정치적 방식으로 구현하려고 하니 모든 것이 혁명을 연상시킨다.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제도나 절차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으로 정책 방향을 설정하니 정치이념 면에서 혁명적이고, 그걸 뒷받침하는 정책 면에서도 굉장히 과격하다. 정치학적으로 말을 한다면, 민주주의와 혁명은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적폐 청산’을 넘어 ‘역사 청산’까지 이야기한다. ‘혁명 이전’을 다 구체제로 규정해 버리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제 식민잔재 청산 얘기를 하다가 동학혁명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해석이 국가주도적인 의식, 혁명 내지는 문화 캠페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위협을 느낀다. 무슨 파시즘도 아니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다.

△성낙인 서울대 명예교수 = 최장집 교수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다시 읽어봤다. 핵심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거냐의 문제다.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 번을 한 건데, 민주주의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당시 탄핵인용이라는 시각이 대세였다. 다만, ‘중대한’ 법 위반에 대하여는 논쟁적인 사항들이 있었다. 이에 ‘6(인용) 대 3(기각)’ 정도의 인용을 생각했었다. 5 대 4로 기각될 여지도 있었다. 어쨌든 결과는 전원일치로 인용 결정이 나왔다. 이건 박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이 재판 과정에서 재판관들에게 삿대질이나 하고 법리 공방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장일치로 탄핵안을 인용했으니 대선은 하나 마나 한 것이었고, 정권을 잡은 쪽에서도 ‘거 봐라’하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 그야말로 노도처럼 밀어붙이지 않았나.

△송호근 = 상당히 중요한 지적인 것 같다. 한계는 있지만 정치 민주화는 이뤄졌고, 다음 단계인 사회 민주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본다. 사회 민주화는 격차와 차별을 줄여주는 거다. 문제는 바로 이 단계에 들어선 이번 정권이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편협한 정책관을 강행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격차와 차별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인 정치세력을 내치는 레토릭으로 활용했다. ‘정의와 공정’ 정책의 결과는 보시다시피 파산이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것은 격차와 차별을 해소하는 정책들과 수미상응해야 하는데, 그게 아예 증발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성과가 전혀 없고,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보면 퇴행이다.

△사회 = 민주화 이후 34년이라는 관점에서, 앞선 정부까지 포함해 문제를 진단해 보면 좋겠다.

△최장집 =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우선 정당 간 균형이 어느 정도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선거 승리가 정당의 생존과 권력 유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조건이 자꾸 만들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정치권력이 점점 대통령 권력으로 집중되고 제도화됐기 때문이다. 한 번 집권하면 얻게 되는 이득과 혜택이 너무 크고, 승자가 얻는 것과 패자가 잃는 것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커졌다. 사실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갈등을 빚는다고 말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차이가 크지 않고 레토릭만 강한 특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과거 권위주의적 정부 운영 방식이 좀 심화하면서 터진 게 촛불 시위다. 이게 전기가 돼 정치 정상화와 갈등 완화로 이어졌어야 촛불 시위라는 게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촛불 시위를 자신들이 대표할 수 있는 사회적 요구를 실현하는 혁명이라고 잘못 해석했다. 이후 지난해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300석 가운데 200석 가까이를 민주당과 그 파생정당들이 차지했다. 여기에 정치의 중심이 광장으로 옮겨오고, 시위 군중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한 여론이 ‘다수’로 해석되면서, 제도화된 국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의 장이라는 게 아무 역할을 못 하게 됐다. 불균형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정치 경쟁이 생사 투쟁처럼 된다. 균형이 이뤄져야 서로 상대를 인정하며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데, 오로지 집권을 위해 일로매진하는 게 한국 정치가 처한 위험한 현실이다.

△송호근 =‘촛불 광장’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 문제다. 나도 광화문광장에 나가봤다. 혁명이란 건 정치적 레토릭이고, 시민들이 요구한 건 두 가지였다. 첫째는 ‘국정 농단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둘째는 ‘대통령은 구중궁궐에만 있지 말고 국민과 소통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 요구를 국가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했다. 촛불 시위에서 동의는 작은 영역이었는데 자기들이 ‘이거야말로 촛불 시위의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고 새롭게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내세운 레토릭이 ‘정의와 공정’이었고, 이는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나타났다. 이건 정책 마인드로 접근했어야 할 사안인데, 문재인 정부는 마치 정의로운 것, 국민적 동의를 얻은 것처럼 말했다. 동의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정의롭다고 해도 결과는 종종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이 정책의 딜레마다. 갈등과 대립만 해도 그렇다. 사실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가까워질 요인이 상당히 많고, 멀어질 요인은 적다. 인종이나 민족, 종교 등 갈등 요인이 없다. 그런데도 접점을 못 찾는 이유는 정통성의 문제 때문이다. 어느 정권이든 ‘내가 정통성이 있고, 너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정통성 싸움을 하며 상대방을 유배 보냈던 행태가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너희는 적폐’라고 찍어내고 있다. 모든 정권이 어느 정도 이런 모습을 보였지만, 이번과 같이 극렬한 정권은 못 봤다.

△성낙인 = 우리가 지난 이야기는 너무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나는 문재인 정권을 이렇게 되게 한 중요한 동인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과 유관하다고 본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 결과 노 전 대통령 본인에 대한 혐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의혹이 있다고 해서 퇴임하고 시골에 내려간 전직 대통령을 중수부 건물 앞으로 끌어내는 바람에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 세력은 한을 갖게 된다. 내전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우리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전 대통령)와 조 바이든(대통령)의 갈등을 보면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지도자들의 이상한 행태가 용납이 안 되는데, 한국까지도 여기에 끼어드는 것 같다. 나라가 강으로 가는지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송호근 = 정권이 바뀌면서 정통성 시비가 끊이지 않더라도 중심축이 있으면 그쪽으로 복원될 힘이 있다. 미국도 트럼프 정부가 한참 탈선했다가 바이든 정부 들어 원상태로 돌아오고 있지 않나. 우리는 중심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화 이후 34년 동안 정통성 시비가 중심축을 계속 갈아 끼우는 식으로 진행됐다. 진보나 보수 모두가 ‘그건 맞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복원할 수 있는 장소가 안 보인다. 이는 민주화 이후 34년을 되돌아보면서 통렬하게 반성해야 할 점이다.

△최장집 = 중심축이란 말이 좋은 것 같다. 정당 간 경쟁에서 중심축이 있으면 마치 산 모양으로 양쪽이 균형을 이루는, 중심이 다수를 구성하는 결정이 이뤄진다. 결정이 이뤄지는 중심에서의 차이는 아주 작다. 그런데 요즘은 완전히 낙타 등처럼 봉우리 두 개가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번 정부의 대외정책을 보자. 현 정부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과거 정부와 달리 탈냉전에 부응하는 진취적인 대북정책을 폈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역사적,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너무도 동질적임에도 분단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이념적으로 양극화됐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양극화는 현실이니, 정부가 새롭고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려면 국내 갈등 구조를 완화하는 노력을 하고 그걸 기반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탐색했어야 한다. 그런데 국내 정치의 균열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혼자만 달려나갔다. 그러니 냉전 시기처럼 남남갈등이 복원될 위험이 생겼다.

△송호근 = 남남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했다.

△최장집 = 독일 통일 과정을 보면, 동방정책을 추진한 서독 사민당이 기민당과 끊임없이 대화 노력을 했다. 그래서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교부 장관이 18년 동안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계속 장관을 맡아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과감한 정책 변화는, 국내 갈등을 완화해 정책에 대한 지지기반을 만드는 것과 병행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현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도 과격한 방식으로 추진됐다. 대통령이 인천공항에 가서 느닷없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한다고 했다. 내용은 진보적일지 몰라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규직이 되려고 노력을 했는데 한꺼번에 그렇게 하면 기준이 무너지지 않겠나. 중요한 정책 결정은 정말 신중하게 장기적 관점에서 내려야 한다. 자기들 정권 내에서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동산 정책을 봐라. 25번인가 발표를 해대니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 아닌가.


“자유민주·공화국 체제에 대한 정치史적 의미 되새길 때”

△성낙인 =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대통령 7명이 나왔다. 다들 ‘공정’을 말했다. 결과적으로 공정의 시각이 아닌 정략적 시각이었다. 부동산 정책도 좋게 보면 공정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결국 이분들이 머릿속에 ‘집 없는 사람과 아주 싼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 더 많지 않냐’는 생각을 갖고 한 게 아닌가 싶다. 결국 표(票)가 중요하니까. 공정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 화두인가. 이 공정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5년 단임 대통령이 ‘내 후계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알다시피 노무현 정부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 다수 구속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구속됐었다. 그런데도 자꾸 집착한다.

△사회 = 문화일보가 이번 기획을 준비한 것도 다음 대선을 우리의 중심축을 잡는 기회로 삼자는 취지에서다. 그 중심축이 될 수 있는 게 헌법 정신이라고 보는데, 가장 강조하고 싶은 우리 헌법 정신은 무엇인가.

△성낙인 = 분열된 상황을 국가 통합으로 이끌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유신헌법처럼 잘못된 헌법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헌법이 잘못돼서 나라가 분열되고 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맞은 건 아니다. 지금 식자(識者)들은 대부분 의원내각제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너무 급격한 변화라고 본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도 대통령을 직접 뽑고 싶어 한다. 그래서 권력을 나눠 갖는 지혜, 즉 ‘나눔의 미학’이 필요하다. 나는 이원정부제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외교·안보·통일 등 ‘큰 정치’는 대통령이 중심이 되더라도 국내 정치는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과 의회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 이는 굳이 개헌을 안 하더라도 실현이 가능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단일 야당이 국회의 절대 과반을 차지한 사례가 없다. 그런데 가령 내년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국회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나라가 마비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민주당이 승리하면 계속 독주하겠지만. 그러니 지금 헌법을 개정하거나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지 않고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관습 헌법’ 논란과 대통령 탄핵 등을 거치면서 모든 국민이 헌법의 존재를 실감했다. 옛날 국민교육헌장처럼 이제는 헌법이 민주 시민의 생활 헌장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치인들도 마음대로 못하게 되지 않겠나.

△최장집 = 우리 헌법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한 헌법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삼권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기초해 있다. 이런 헌법 정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결국 한국의 문제는 헌법 정신에 담긴 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하고, 정치인들이 존중하지 않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법행정 관료들도 역할을 잘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헌법 정신이나 조문을 강조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헌법이 지켜지려면 정당 간 균형이 이뤄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잘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 권력이 너무 압도적이다. 이것도 모자라 21대 총선에서 국회 의석수의 5분의 3 정도를 집권당이 갖게 됐다. 권력이 독주하고 야당의 역할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헌법이 존중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송호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헌법 제1조 1·2항은 1948년 명문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 후 그에 걸맞은 관행·관습·인식 등을 키워왔지만 아직 자유민주주의와 공화국 등에 대한 인식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것 같지 않다. 정치권은 여전히 헌법 조문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합리화하고 지지율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기본정신에 대한 존경 없이 이뤄지는 입법이 사회 갈등을 풀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이 시점에 자유민주주의와 그 틀을 구성하는 공화국 체제에 대한 지성사적·정치사적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게 필요하다.

△성낙인 = 지금 우리 헌법은 바꾸긴 해야 한다. 1987년 이른바 ‘1노(노태우)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대표해 나온 여야 8인 정치회담에서 헌법을 만들다 보니, 조문 자체가 맞지도 않는 게 있다. 예를 들면, 국가배상법 제2조 1항 단서의 ‘군인·군무원 이중배상 금지’ 조항은 제3공화국 시절이던 1971년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1972년에 유신헌법에 이 조항이 그대로 반영된 이후 여전히 살아 있다. 권력구조 면에서도 5년 단임 대통령제라는 건 전 세계에 우리 말고는 없다.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국민이 본다면, 이를 극복할 방책이 무엇인가가 개헌의 초점이 돼야 한다. 거시적으로는 헌법에 국가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규정을 두는 게 필요하다. 사실 국가, 국기, 국어 등에 대한 법률도 2000년대 들어 제정됐다. 또 우리 헌법에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민주적 기본질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의 개념이 구분도 없이 혼재돼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가 아닌 만큼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로 통일시켜야 한다. 이렇게 헌법을 통해 정통성 문제를 분명히 하면 굳이 ‘건국’이니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니 따질 필요도 없어진다. 아울러 우리 헌법은 ‘민족적 민주주의’ 성격이 있는데, 이제 다문화 시대인 만큼 ‘시민적 민족주의’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송호근 = 나는 이제 내각책임제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다. 현행 제도로는 대통령에게 힘이 너무 많이 실리고, 헌법에 명시된 권력 분립 원칙도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의 권력 집중 현상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국회의원도 지금처럼 소선거구제로 계속 뽑을지 중선거구제로 뽑을지 논의해야 한다. 검찰·경찰·감사원 등 주요 권력기관들이 권한 남용을 하지 못하게 명시하는 것도 필요하다. 대선 과정에서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국민이 개헌 청원을 하고, 정당들이 이를 받아 선거 의제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최장집 = 송 교수가 한국 정치의 문제를 ‘정통성을 향한 투쟁’으로 정리한다면, 나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이라 생각한다. 대통령 권력이 강한 상태에서는 삼권분립이 가능하지 않다.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여러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정부 형태를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우리가 시험할 수는 있다고 본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중심제는 쉽게 독재화할 수 있는 체제이고, 통치자 선출 방식도 그렇다. 프랑스도 5년 연임 대통령중심제지만, 결선투표제를 통해 최고 득표자를 뽑게 돼 있다. 우리는 대선을 한 번만 치르고, 단순다수제이다. 그렇게 뽑힌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권력이 너무 많다. 쉽지 않겠지만 개헌이 가능하다면 의회중심제로 가야 한다고 본다. 개헌이 어렵다면 최소한 대통령 선거 방식이라도 바꿨으면 좋겠다. 총선 방식도 그에 못지않게 문제다. 2020년 20대 국회가 끝나가는 시점에 개정된 선거법은 최악의 선거법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다음 구성되는 국회에서는 한국의 정당 발전을 위해 선거법을 다시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낙인 = 우리 헌법이 1948년 처음 제정돼 현행 헌법이 9번째이다. 1987년 개헌 이후 34년이 지났으니, 조금 있으면 그 이전 헌법들이 지속된 기간(39년)보다 현행 헌법을 유지한 기간이 더 길어지게 된다. 사실 사회가 다원화할수록 헌법 개정은 어려워진다. 정치제도로 돌아가면, 우리가 제2공화국 때 잠깐 의원내각제를 경험했다. 우리가 의원내각제를 하더라도 독일처럼 되지 않고 제2공화국처럼 이원정부제로 작동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권력의 분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프랑스의 경우 외교, 국방, 유럽연합(EU) 관련 문제는 대통령 고유 사항으로 하고, 나머지는 내각 중심으로 간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숙고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전봇대 뽑으러 다니고, 인천공항 찾아가고 이런다.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니, 권력을 좀 나눠서 나라의 일상적인 업무는 국무총리와 내각에 넘겨야 한다. 대통령이 그런 자세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련 규정을 그렇게 바꿔주는 게 필요하다.

△최장집 = 현행 헌법도 총리를 국회에서 뽑도록 하고, 내각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돼 있지 않나. 조문 상으로는 총리의 역할이 나름대로 있는데, 하나도 안 지켜지는 게 문제다.

△성낙인 = 그래서 나는 국회가 총리 해임건의를 할 게 아니라 의원내각제식으로 해임의결을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내각도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 총리가 각료 임명 제청권을 갖는데, 그게 실제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더라도 내각회의를 강화해서 내각이 총리를 좀 무서워하게 해야 한다.

△송호근 = 총리는 ‘얼굴마담’이 됐다.

△성낙인 = 장관들부터 총리를 그렇게 생각하니 일이 안 되는 거다.

△사회 =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나오는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전히 강력한 지도자가 일도양단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한 것 같다.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성낙인 = 현행 헌법으로 대통령을 7명 뽑았고, 내년이면 35년째가 된다. 이제 국민의 선택 문제다. 나는 당도 중요하지만, 일반 국민을 생각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세상 사람들과 부딪쳐 보고, 친구들하고 소주·막걸리도 마셔 보고, 직장 생활하면서 상관도 만나고 부하 직원도 만나고…. 이런 보통 시민으로서 조직 생활을 충분히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송호근 = 여러 영역 중 정치가 일반 시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 정치결정론까지는 아니어도 정치의존성이 상당히 높다. 한국의 경우 특히 그렇다. 일반 시민들은 정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표피층에서는 이해하는데, 한층 더 깊이 들어가면 이해를 못 하는 듯하다. 대중의 정치혐오증도 원인이지만, 대립적 소용돌이 정치가 정치의 심층구조를 감추고 은폐하는 탓도 크다. 내가 시민을 탓하는 건 아니고, 대선 기간만은 약간 더 깊은 층, 현상을 지배하는 그 뒤의 힘을 읽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성향을 잠시 접어두고 적어도 하루에 10분 만이라도 정치현상의 심층 이해에 투여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레토릭 속에서 허위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게 대선 정국에서 국민의 실천요강이 됐으면 좋겠다.

△최장집 = 촛불 시위의 부정적 결과는 제도화된 정치의 공간을 부정하고, 이걸 직접민주주의랄까, 광장으로 끌어내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의견이 유사한 집단 사이에서만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는 거다. 이런 직접민주주의적 현상을 민주당 정부 개혁파들이 강조했고 실제로 그런 변화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정당이 취약하고 제 역할을 못 해 왔는데, 더 심해졌다. 이성적인 공론장이 파괴되고 소멸되면서 지식인들이 정치 관련 발언을 못 하는 상황이 됐다. 언론 통제를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론이 정치를 지배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조직화된 강력한 의견집단이 여론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정치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론장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언론과 지식인,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대학교수들을 보면 프로젝트 한다고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거나 대안을 고민하는 게 안 보인다.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이 걱정된다.

△송호근 = 칼럼을 써도 정치권으로부터 개선의 움직임 같은 메아리가 없다. 마치 물속에 돌멩이 던지는 것처럼 허무하다. 공론의 실종이고, 공론장의 분절이다.

△성낙인 = 옛날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통 사람 노태우’를 슬로건으로 걸었다. 다시 이 시점에 ‘보통 사람 대통령’ 캠페인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정리 = 오남석·김현아·최지영 기자
사진 = 김낙중 기자


◇도움 주신 분들(가나다 순)

△강성진(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강원택(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고문현(숭실대 법학과 교수)
△권혁주(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김선택(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종철(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명호(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서기석(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성낙인(서울대 명예교수)
△송호근(포스텍 석좌교수)
△안병진(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이효원(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장영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채진원(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특별취재팀

오남석(문화부)·민병기(정치부)·박준희(특별기획팀) 차장, 임정환·박세희(이상 국제부)·김현아(정치부)·최지영(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