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의 지식카페>‘고진감래’ 유효하지 않은 AI시대… 일개미 사라지고 투기개미 판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이철형 작가

■ 김태환의 이야기철학 - ⑬ 흔들리는 ‘미래 위한 인내’

수렵 → 농업 바뀌면서 씨앗 뿌리고 길러 오래 먹을 식량 장만…‘긴 시간 노동 견디면 내일은 달콤’ 교훈 만들어
테크놀로지 시대엔 기존 산업 패러다임 깨지고 미래 불확실… 교육 - 직업 연관성 약해지고 노동의 가치도 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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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던진 그물에 멸치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멸치는 자기가 지금은 너무 작으니 일단 놓아달라고 어부에게 애원했다. 자기가 나중에 더 커졌을 때 잡는 것이 어부에게도 훨씬 더 큰 이득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부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한다. “불확실한 희망 때문에 손에 들어온 것을 버리라고?”

이솝우화에는 현재와 미래의 긴장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어부와 멸치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멸치는 어부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서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어부는 냉정하다. 멸치가 자라서 순순히 자기 손에 돌아올 거라는 환상을 품지 않고(게다가 멸치가 자라봐야 얼마나 더 자랄까), 손안에 확실하게 들어온 새끼 멸치를 선택한다.

어부처럼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해서 낭패를 본 것은 늑대다. 늑대가 잠든 개를 덮쳤는데, 개는 자기가 너무 비쩍 말라서 먹을 것이 없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오라고 설득한다. 며칠만 지나면 주인집 결혼식이 있고, 개도 그때 많이 얻어먹고 살을 더 찌울 것이기 때문이다.

늑대는 그 말에 혹해서 결혼식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개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번에 개는 늑대를 피해 지붕 위에서 자고 있었다. 늑대를 보자 개는 말한다. “다음에 내가 문앞에서 자고 있는 걸 보거든, 다신 결혼식 같은 건 기다리지 마.” 늑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허황된 기대에 정신이 팔려 운 좋게 굴러 들어온 먹잇감을 놓치고 만다.

어부와 늑대의 선택은 상반되지만, 두 우화가 전하는 교훈은 동일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가진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현재와 미래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대립 구도에 배치된다. 미래는 커 보이지만 신기루 같은 것이고 현재는 보잘것없어 보일진 모르지만 실체적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선택하는 사람은 현실 감각을 지닌 견실한 생활인의 유형에, 미래를 선택하는 사람은 투기적이고 비합리적인 모험가의 유형에 속한다. 여기서 올바른 것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생활인의 유형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미래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지금, 여기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잡아라.

그런데 어떤 이솝우화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가치가 완전히 전도된다. ‘개미와 매미’ ‘개미와 쇠똥구리’와 같은 우화가 그러하다.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먹을 것을 모아서 겨울에 먹을 양식을 장만한다. 쇠똥구리는 동물들이 모두 일을 쉬고 편안히 있을 때 개미가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매미는 노래만 부르며 여름을 즐겁게 난다. 쇠똥구리는 겨울에 쇠똥이 없어서 주린 배를 안고 개미를 찾아가고, 매미 역시 개미에게 구걸하는 신세가 된다. 개미가 미래의 생존을 위해 현재의 안락을 포기했다면, 반대로 쇠똥구리와 매미는 현재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포기할 줄 몰랐고, 그 결과 미래가 현실이 됐을 때 생존의 위험에 빠지고 만다. 여기서는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의 욕망을 참고 견뎌내는 사람이야말로 합리적이고 견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고, 현재에 몰입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아예 잊어버리는 사람은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성격의 표본으로 나타난다. 개미나 늑대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것은 같은데, 왜 늑대는 어리석은 것이고 개미의 행동은 성공적 삶을 위한 본보기로 제시되는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끊임없는 저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주어진 것을 편안히 즐기느냐, 아니면 지금 좀 참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할 것인가. 동서고금의 많은 인생 교훈은 미래를 선택하라고 가르친다. 송나라 진종 황제는 권학문(勸學文)에서 책 속에 황금 대궐과 온갖 부와 명예가 들어 있으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했고, 그런 생각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사자성어 속에도 간명하게 표현돼 있다. 현재의 고통스러운 노력이 미래의 달콤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잘 참을 줄 안다는 것은 곧 지혜로움의 증거가 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가 때로는 ‘참을성이 많은 오디세우스’라고 불리고 때로는 ‘현명한 오디세우스’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끝내 집에 돌아와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시무시한 거인족 폴리페모스를 속여넘기는 지략 덕분일 뿐만 아니라, 그를 도중에 주저앉히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참을성 덕분이기도 했다. 즉각적 보상을 충동적으로 취하지 않고 미래의 더 큰 보상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성공적 삶을 위한 중요한 성격 자질임을 증명했다는 그 유명한 스탠퍼드대학의 마시멜로 실험도 이 오래된 지혜에 과학의 외피를 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진감래 혹은 지연된 보상의 원리는 인류 문명의 근간을 이룬다. 인간이 눈앞에 있는 것을 즉각 잡아먹는 삶에서 씨앗을 뿌리고 가축을 길러 오래오래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장만할 수 있는 삶으로 전환한 때부터, 노력과 보상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발생했고, 당장의 보상이 없는 긴 시간 동안 괴로운 노동에 매진할 수 있는 성실성, 곡식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참을성이 중요한 성격적 자질로 요구된 것이다. 고진감래는 농부의 세계관이다. 여름에 땀 흘려 일하고 그렇게 장만한 먹을거리로 겨울을 무사히 나는 개미는 농부의 의인화이다.

그렇다면 왜 어부가 크게 자라서 돌아오겠다는 멸치의 약속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어부는 농업 경제의 원리를 따르는 양식업과는 거리가 멀다. 어부는 수렵채집 경제에 속한 인간이다. 수렵채집 경제의 핵심은 손에 들어온 것을 바로 취한다는 데 있다. 손에 들어온 멸치를 놓아주면, 멸치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난다. 바다를 돌아다니는 물고기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물에 잡힌 작은 물고기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손안에 있는 참새가 지붕 위의 비둘기보다 낫다(A sparrow in the hand is better than a pigeon on the roof)”는 영어 속담이 말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커서 돌아오겠다는 멸치의 약속을 믿고 손에 잡힌 멸치를 포기하는 것은 지혜로운 참을성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미래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늑대가 바로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들었다. 주인집의 결혼식 이후에 개가 더 살쪄 있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린 늑대는 사냥꾼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인간 같은 가축 사육자라고 착각한 것이다. 늑대는 개보다 힘이 세서 개를 일단 붙잡기만 하면 잡아먹을 수는 있지만, 개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개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는 없다. 개를 살찌워서 잡아먹는다는 늑대의 꿈은 물거품처럼 꺼져버린다.

사냥꾼인 늑대가 가축의 사육자처럼 현재 대신 미래를 선택했다가 낭패를 겪었다면, 굶주린 갈까마귀는 채집 경제에 속해 있으면서 농부가 된 착각에 빠지는 바람에 여우에게 조롱을 당한다. 갈까마귀는 무화과나무에 앉았다가 무화과가 아직 익지 않은 것을 보고, 무화과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말하자면 곡식이 익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농부의 제스처를 취한 것인데, 문제는 굶주린 갈까마귀에게는 농부 같은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나가던 여우가 갈까마귀가 나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까닭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속일 줄은 알아도 배를 채워주지는 않는다네.” 갈까마귀는 오곡이 익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익은 열매를 찾아다니며 배를 채워야 한다. 갈까마귀의 삶은 농부의 삶과 달리 장기적 시간적 질서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다는 고진감래 혹은 ‘지연된 보상’의 세계관은 인간이 미래를 통제하고 장기적으로 삶을 계획할 수 있게 된 시대의 산물이다. 미래란 언제나 불확실하며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류 문명의 바탕에는 인간이 미래를 어느 정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계절과 천체의 변화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정확한 달력의 제작은 미래를 예측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이고, 그러한 노력이 농업 경제의 발전과 나란히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농사짓기처럼 미래에 창출될 가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노동이 의미를 지니려면 미래에 대한 기대가 허황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인류는 우선 농업을 통해 미래를 통제하고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생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따라서 농업 경제의 기반 위에서 발전한 사회적 제도와 관습도 고진감래라는 농업적 시간 구조에 따라 구축됐다. 인류 문명은 농업 생산 과정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삶의 차원에서 안정되고 질서 있는, 그래서 예측 가능한 시간의 흐름을 창조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인간의 삶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교육·직업·노후와 같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게 구조화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상당 기간 동안 많은 노력과 비용을 투입해 교육 과정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이 장차 삶의 필수불가결한 기반이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노후에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은 여름에 땀 흘려 일하고 그때 모아놓은 것으로 겨울을 나는 농부-개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견실하게 운영되는 연금 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해 지금의 소비를 줄이는 데 동의하도록 만든다. 제도적으로 보증된 구속력 있는 약속과 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통제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미래의 시간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이에 따라 현재의 노력으로 미래의 보상을 기다리는 고진감래의 원리가 삶의 모든 국면에서 관철된다.

전반적으로 제도적 안정성이 미약하고 사회적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도 커진다. 또는 다양한 요인으로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제도와 질서가 현재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미래의 가능성을 확실히 보장해주리라는 믿음이 허물어질 수도 있다.

이때 고진감래의 세계관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 결과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기꺼이 희생하려는 동기는 약화되고, 내일은 알 수 없으니 순간순간 주어진 것을 챙기고 소모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사냥꾼의 세계관이 득세하거나, 극히 불확실해진 미래를 향해 비합리적인 희망을 품고 현재를 내던지는 모험적 투기가 성행하기도 한다. 현시대는 분명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 디지털과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이 전통적인 산업과 경제의 패러다임을 파괴하면서, 교육과 직업의 연관 관계가 점점 느슨해지고, 인간 노동의 가치가 장차 어떻게 평가될지도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름에 땀 흘리며 차곡차곡 쌓아둔 것으로 평안한 겨울을 즐기던 농부-개미의 시대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휴식을 모르고 분주하게 일하던 일개미의 시대도 지나버린 듯하다. 그래서 일밖에 모르던 개미도 주식에 매달리는 투기 개미로 변종한 것이 아닐까.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용어설명

마시멜로 실험
아이에게 마시멜로 하나를 주고 “15분 동안 먹지 않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고 한 뒤 아이가 못 참고 먹는지 아니면 끝까지 참아내는지를 관찰하는 실험이다. 1972년 스탠퍼드대학 교수인 심리학자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이 ‘만족스러운 지연’을 연구하기 위해 수행한 실험이었는데, 아이가 작지만 즉각적인 보상과 시간이 걸리지만 2배의 보상 중 어느 것을 택하는지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