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미술 알리는 플랫폼 만들고 美·獨·中서 전시…K-아트로 세계 홀릴 것”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윤범모 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입구에서 포즈 요청에 쑥스러워하면서도 배우처럼 자세를 취하며 “미술 한류를 위해 스타 작가, 큐레이터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창섭 기자

■ 현안 인터뷰 - ‘미술 한류’ 시동거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비디오아트 스트리밍 플랫폼
홍콩·태국 등과 협업해 개설
유럽으로 네트워크 확대할 것

韓근현대미술 120년史 개론서
한국어판 이어 영문판 곧 발간

이건희 컬렉션 1488점 들어와
최고의 眼福 누린 행복한 관장

‘e - 뮤지엄’ 강화 역발상으로
팬데믹 위기가 되레 기회 돼
가디언·포브스 등도 큰 호평

인터뷰 = 장재선 선임기자

미술 시장에 불이 붙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문화계 다른 영역이 위축됐으나 미술 시장은 활황세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SEOUL)가 20년 역사상 최고 매출을 기록했고, 경매업체들이 수집가들의 구매 열기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2040 젊은 세대 컬렉터들이 미술품 투자에 관심을 두면서 붐이 확산하는 모양새다. 해외 유명 갤러리들은 한국 미술 시장이 더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잇달아 서울에 지점을 열고 있다. 국내 미술계는 이런 분위기를 계기로 한국 작가들이 세계에 더 많이 알려져 ‘미술 한류’를 이끌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다. K-팝, K-시네마에 이어 K-아트의 꿈은 과연 가능한가. 아트파워 피플로 국내 첫손에 꼽히는 윤범모(70) 국립현대미술관(MMCA·국현) 관장을 최근 서울 삼청동 ‘국현 서울’에서 만나 물었다.

―미술 한류가 화두다. 한국 대표 뮤지엄인 국현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전진 기지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관련 전시를 추진해왔다. 내년에 미국 LA 카운티 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전을 연다. 중국 국가미술관 소장품 교류전, 대만 시립미술관 서예전도 예정돼 있다. 현대 미디어아트의 메카로 불리는 독일의 ‘ZKM’에서도 김순기 전을 펼친다. 내후년엔 세계 최고 뮤지엄으로 인정받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한국실험미술전을 한다. 이런 규모로 해외에 우리 미술을 알리는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내년이 미술 한류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시장에서 K-아트 이름이 아직 높지 않다. 미술 한류가 과연 가능할까.

“21세기는 문화 영토로 강국이 되는 것 아니냐. 우리처럼 작은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으려면 문화예술 위상을 높여야 한다. 그동안 한류를 대중문화가 선도했는데, 순수 예술도 역할을 해야 한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미술은 통역 과정이 없으니 국제화가 유리하다. 고가의 상품이니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적으로 스타가 될 작가가 우리 미술계에 많다. 스타 작가와 함께 스타 큐레이터도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무대와 소통하며 일할 수 있도록 문화 기관들과 뮤지엄이 틀을 마련해줘야 한다.”

윤 관장은 미술 한류를 위한 플랫폼으로 국·영문 통합 홈페이지 ‘한국 미술’을 내년 상반기까지 구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콩, 태국, 필리핀 등과 함께 비디오아트 스트리밍 플랫폼도 만든다. 내년부터는 유럽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할 계획이다. VR 영상을 통한 한국 미술 소개 작업도 박차를 가한다. “이수경 작가의 ‘달빛 왕관’이 유튜브를 통해 세계적으로 관심을 얻었잖아요. 그걸 이어서 서도호 작가의 작품 영상을 연내 공개할 예정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윤범모 관장이 한국미술 120년사를 정리한 책을 소개하고 있다.

―해외 연구자들을 위한 한국미술 영문판 가이드북을 내겠다고 했었는데….

“제대로 된 가이드북 한 권 없는 게 안타까워서 관장 취임 때(2019년 2월) 약속했다. 한국근현대미술 통사 개설서를 영문판으로 펴내겠다고. 그런데 복병이 너무 많아서 이번에 한국어판부터 먼저 펴내게 됐다. 책 한 권이지만, 120년의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집약 정리해야 하니 특별전 서너 개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공이 많이 들었다. 세부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할 게 많아서 3년이나 걸렸다. 앞으로 이 책을 기반으로 수정, 보완하며 우리 미술사를 기록해나가면 될 것이다. 현재 국내외 전문가들이 영문판 감수를 진행하고 있는데, 곧 나올 것이다. 세계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책이 될 것으로 믿는다.”

국현이 펴낸 책 ‘한국미술 1900~2020’은 5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에 도판만 400여 장을 수록하고 있다. 34명의 연구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연대기 순으로 우리 미술사를 정리했다.

―책에서 일반인에게 익숙한 ‘동양화’ ‘서양화’라는 용어를 지양하고 ‘채색수묵화’ ‘유화’ 등 재료와 기법 중심으로 표기한 까닭은.

“학자들이 집중 토론을 한 후에 확정해서 실행한 것이다. 동양화, 서양화라는 말은 우리만 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선미전을 하며 전통 회화 부분을 동양화라고 했다. 당시 일본인 화가들이 우리 땅에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의 작품을 조선미전에 출품하게 하려니 전통 그림 부문을 ‘조선화’라고 하지 못하고 ‘동양화’라고 한 것이다. 나중에 일제 잔재라고 해서 ‘한국화’라고 바꿨는데, 그것도 100점짜리는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국 사람이 그리면 다 한국화가 아니냐. 그런데 서양화는 한국 사람이 그렸는데도 그렇게 부르니…. 그래서 재료와 기법 중심으로 나눈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이 1488점이나 국현에 오면서 ‘행복한 관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국현의 1년 소장품 구입 예산이 48억 원인데, 그 예산으론 수백 년 걸려야 살 수 있는 작품들을 한꺼번에 받았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였다.)

“참으로 행복했다. 관장 임기에 귀한 작품을 많이 받은 것도 행복하지만, 개인적 인연이 있는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으니 안복(眼福) 중 최고의 안복을 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84년 미술 기획자로서 첫 출발을 할 때 호암갤러리 개관 실무를 담당한 인연이 있다. 그때 직접 발굴했던 백남순의 ‘낙원’ 등을 30년이 훨씬 넘어 다시 보게 되니 그 감격이 어땠겠는가. 김환기의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작품을 우리 국현이 소장하게 되니 꿈만 같았다.”

이건희 기증품 중엔 국내 명작들뿐만 아니라 모네의 ‘수련’ 등 세계 보물급 작품들이 있다. 이런 작품들은 국현의 소장품 수준을 일거에 도약시켰다. 윤 관장을 포함한 국현 임직원들은 만날 때마다 그 기쁨을 말하고 있다.

―정부가 ‘이건희 기증관’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면 국현이 기증받았던 작품을 그쪽으로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연구 중이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방안을 확정해서 시행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증자 뜻을 기릴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하자, 문화체육관광부가 곧바로 별도의 이건희 기증관을 추진했다. 대통령 뜻을 과잉 해석한 게 아닌가.

(별도의 기증관은 기증자 뜻에 반한다는 문제가 있다. 유족이 고 이건희 회장을 뜻을 헤아려 미술품을 여러 기관에 배분했기 때문이다. 또한 향후 기증관을 유지하는 인력, 비용 등의 과제도 해결해야 한다. 당장 부지를 선정하는 것부터 난항 중이다.)

“미술관 내부에 이건희 컬렉션 전시관을 마련하면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일이 이렇게 진행됐다. 중지를 잘 모아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

그는 국립 문화기관장으로서 정부 추진 사업에 대해 엇박자를 내지 않으려는 듯 신중하게 답했다.

―국현 운영에서 윤범모만의 정체성이 없다는 비판도 있더라.

“하하하, 미술관 운영에 대해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다. 저는 스스로를 ‘백조 관장’이라고 한다. 겉으로 볼 때는 우아하지만, 두 발은 남모르게 끌탕을 한다. 국현은 서울 본관을 포함해 덕수궁, 과천, 청주까지 4관을 운영해야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생각해야 한다. 획일적으로 운영하기보다는 다양성에 가치를 둬야 한다.”

―임기 중 코로나19 사태를 겪었다. 미술관으로서는 위기인데,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지 않은가. 온라인 뮤지엄을 강화해 코로나19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소장품 내용을 적극적으로 소개할 뿐만 아니라 사이버 전시도 크게 늘렸다. 그 덕분에 영국 가디언, 미국 포브스지 등이 우리 온라인 뮤지엄을 세계 10대로 꼽으며 방문을 추천할 정도로 성가가 높았다. 미술관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코로나19가 준 선물이다. 포스트 코로나에도 우리 장점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는 팬데믹이 큰 기획에 차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하지 않았던 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고 했다.

“그런 면에선 ‘행복 관장’이다(웃음). 개관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서예전을 했는데, 예상보다 호응이 컸다. 그걸 영상으로 만들었더니 12만 명이 넘게 접속했더라. 그 어렵다는 서예를 외국에서도 많이들 봤다. 서예 본산이라고 자처하는 대만의 시립미술관이 우리 전시를 가져가겠다고 한다.”

―반려견 입장을 허용한 ‘개를 위한 미술관’ 전시도 인상적이었다.

“인간만이 이 지구의 주인이냐, 개가 주인이 되면 안 되나, 이런 역발상으로 기획했다. 미술관은 상상력 충전소여야 한다. 현대인의 일상에 자극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