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天·地·人 사상’… 21세기 베니스서 세계인과 만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관 내부의 작품들. 빛과 탄성의 관계에 의해 382개 셀의 밝기와 색이 변화하는 ‘채도 V(Chroma V)’가 오른쪽에 보이고, 그 앞에 거꾸로 서있는 나무 형상의 ‘충동 (Impulse)’이 있다. 작품 속 펌프들이 액체를 수액처럼 가지에 흘려보낸다.

■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서 선보이는 김윤철作 ‘나선’

예이츠의 詩 ‘재림’서 제목 따와
인간중심 문명의 종말 관한 성찰
인간-기계, 자연-물질 관계 사유
한국관 천장 뜯어내 파격적 외관

하늘·땅을 인간이 매개하는 사상
국가 초월한 새 문명에 대한 통찰
큐레이터와 협업 중 갈등 → 봉합
혼란스러운 과정도 ‘나선’ 일례

“인간 육체를 구성하는 ‘신경(神經)’을 한자로 풀면 ‘신이 다니는 길’이에요. 지상과 천상을 연계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천지인(天地人) 개념이 동아시아에 있잖아요. 신경이 그 통로가 되는 거지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인 김윤철(52)은 작품 주제 중 하나인 ‘신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오는 23일(현지시간) 개막하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설치작품 ‘나선(螺旋·gyre)’을 선보인다. 작품 제목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재림(the Second Coming)’에서 따왔다. 예이츠가 세상의 혼란을 소용돌이(gyre)로 표현하며 새 문명의 도래를 예언한 것에서 착안했다. 김 작가는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징조가 드러난 인간 중심 문명의 종말을 성찰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서구의 이분법으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작품으로 드러낸다. 인간과 기계, 자연, 물질, 질료가 우주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얽히는 관계를 보여주며 기존 사유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올해 한국관 큐레이터인 이영철(65) 예술감독은 “전시장 건물 자체가 작품들과 하나의 육체가 되는 개념”이라며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에 있는 한국관 천장을 최초로 뜯어내기 때문에 파격적 외관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 나선 모양의 작품들을 드러낼 계획이다. 전시장 내부에선 물질과 빛이 흐르고, 작품들이 유기체처럼 꿈틀대는 얼개라고 했다.

이번 한국관 작품은 ‘부풀은 태양’ ‘신경’ ‘거대한 바깥’이라는 세 주제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주제는 태양이 종말로 갈수록 점차 부풀어 오른다는 데서 착안했으며, 절대성의 붕괴를 뜻한다. ‘신경’은 한국관의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서 핏줄을 흐르게 하는 것을 은유한다. 동시에 저 멀리 우주에서 오는 신호들을 포착하는 매개를 상징한다. ‘거대한 바깥’은 인간이 그동안 파악하지 못했던 세상의 흔적과 징후를 보여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작가의 설명에서 크게 주목되는 부분은 ‘천지인’ 개념이다. 하늘과 땅을 인간이 매개한다는 사상은 동아시아 중에도 우리 민족에게 뚜렷이 전하는 것이다. 천부경 등의 경전을 초들 것도 없이 고대사 속의 소도(蘇塗)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땅에 나뭇가지를 꽂고 동물의 모양을 매달아 하늘의 신을 부르고, 그 자리에서 인간이 노래하고 춤추며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그런 천지인 사상이 한국관 작가의 작품에 스며 베니스비엔날레에서 21세기의 세계 관객을 만나는 셈이다.

물론, 이는 한국 전통사상의 깊이를 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김 작가는 “국가를 초월한 예술을 하고 싶다”고 분명히 말할 정도로 내셔널리즘에 알레르기가 있다. 독일에서 18년 동안 거주하며 글로벌 시각을 키운 그는 지난 2009년 한국관 참여 작가 양혜규가 그랬던 것처럼 국가관 작가가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자신의 예술 사유가 국경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평소에 지구 밖의 우주로까지 시선을 넓혀서 새로운 문명에 대해 통찰하다 보니 이번 작품에 천지인 개념이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일 뿐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관 작품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풀은 태양들(Argos-the Swollen Suns·위 사진)’. 우주의 뮤온 입자 검출 기능을 한다. 아래는 ‘채도 V’의 상세 이미지.

김 작가는 한국관에서 총 7점의 설치작품을 내놓는다. 지난 2019년 서울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개인전을 통해 선보였던 ‘크로마(Chroma)’ ‘아르고스(Argos)’ ‘임펄스(Impulse)’ 등을 새롭게 다듬었고, 신작도 3점을 제작했다. 이 감독은 “한국에서 전자 음악을, 독일에서 미디어아트를 공부한 김 작가의 역량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라고 소개했다. 화학, 물리학, 수학을 인류학, 신화학, 종교학에 연계하는 초학제적 특성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김 작가는 지난 2016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주는 콜라이드 국제상을 받았을 정도로 과학에 조예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처음 알게 돼서 나중에 그가 한국전을 할 때 평문을 썼지요. 그런 인연으로 이번에 한국관 큐레이터와 작가로 일하게 됐는데 도중에 갈등이 불거져서 안타깝습니다.”

이 감독과 김 작가는 작년 가을부터 협업하는 과정에서 한국관 사무국 운영, 예산 집행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었다. 감독의 도덕성 논란까지 외부에 나돌며 위기에 처했으나, 결국 두 사람이 화해하고 봉합했다. 그러나 갈등의 근본 원인이었던 한국관 운영 제도를 개선하는 과제는 남았다. 한국관 커미셔너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감독 선정 과정에서 선정위원 구성 문제로 잡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감독은 “한국관 준비 과정은 혼란스러운 ‘나선’과 같다”고 했고, 김 작가 역시 “절대성이 무너지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소음”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한국의 대표적 기획자고, 또 한 사람은 폭넓은 사유를 다각적 방법으로 작품화하며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작가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갈등까지를 작품에 스며들게 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나선’의 역설을 만들어낼까. 한국관 후원사 중 하나인 바라캇 컨템포러리 서울의 이화령 이사는 “다양한 시각이 불거진 것이 새 출발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며 “베니스에서 좋은 전시를 함으로써 전화위복으로 삼을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