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왜 식사 뒤 관대해지나?

■ 노이즈 | 대니얼 카너먼·올리비에 시보니·캐스 선스타인 지음 | 장진영 옮김 | 김영사

의사들도 병원 문닫는 시간에는
마약성 진통제 처방확률 더높아
생각의 잡음, 사회적부작용 초래
케바케·복불복 판단의 오류 불러

편향과 달리 잡음은 눈에 안띄어
교정 위해선 통계적 사고 필요해
분야별 세밀 가이드라인 정립도
잡음 없을땐 보다 공평하고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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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 있는 곳에 ‘잡음’이 있다. 잡음은 제도 신뢰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끔찍한 불공평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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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창시자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의 ‘노이즈’는 판단 오류를 낳는 원인으로 ‘잡음’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생각의 경향을 일컫는 ‘편향’에 관한 연구는 활발했으나 산발적으로 흩어진 ‘잡음’을 광범위한 데이터 분석으로 규명한 보고서는 최초다. 경영전략가 올리비에 시보니,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과 함께 쓴 책은 법원과 병원, 보험회사와 과학수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각의 잡음’이 개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꼬집는다. 카너먼은 직관적 사고의 위험성을 심리학 이론으로 분석한 전작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한 발 나아가 같은 사안을 놓고 판이한 결론을 맺는 전문가들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 판단을 최소화하는 해법을 모색한다. 행동경제학 방법론을 인간의 사고와 판단까지 확장한 저자들은 “편향이 ‘쇼의 주인공’이라면 잡음은 눈에 띄지 않는 ‘단역 배우’”라며 “편향과 잡음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인지 오류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잡음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다. 첫 번째로 먼저 이뤄진 검토 결과가 이어지는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두 사람의 망명 신청이 연달아 승인됐을 때 담당 판사가 다음 이민자의 신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평균보다 19% 낮았다. 연속으로 같은 결과가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도박사의 오류’다. 기분이나 날씨 등의 변수도 ‘복불복’ 판단의 요인이다. 의사들은 병원 문을 닫는 저녁 무렵이면 시간 압박 탓에 부작용이 있어도 마약성 진통제 같은 즉효 약을 처방할 확률이 높다. 또 판사들은 휴식 직전보다 식사 후에 가석방을 승인하는 경우가 많고, 응원하는 축구팀이 패배한 날엔 더 가혹한 판결을 내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연구결과도 있다. 저자들은 무더운 날 망명 신청이 인용될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조사에 대해선 “시원한 날 심리가 진행되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라고 비꼰다.

과도한 상호작용이 판단을 흐리기도 한다. 흉악범죄를 다루는 배심원 평결에 참여한 시민이 다른 배심원들과 의견을 나눈 뒤 본래 의도보다 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정보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려도 문제다. 최첨단 기법이 동원되는 과학수사 현장에서 이런 정보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이 흔히 발생한다. 같은 지문을 보고도 담당 형사로부터 잡다한 정황증거를 전해 들은 지문 감식관이 지문 자체에 주목하는 감식관보다 과격한 판단에 이르는 것이다. 실제로 뒤늦게 무죄가 입증된 350개 사건을 분석한 결과 잘못된 유죄 판결의 45%는 과학수사의 오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양육권 결정, 기업의 신상품 매출 예측과 근무 평정, 특허권 부여 과정에서도 ‘고무줄 잣대’에 따른 잡음은 숱하게 발견된다. 책은 “담당자 성향과 외부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제비뽑기’나 ‘추첨’ 행위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한다.

편향과 달리 잡음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고, 예측하기도 힘든 오류이기에 ‘교정’을 위해선 통계적 사고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들은 가능한 한 ‘판단 영역’을 ‘계산 영역’으로 바꿀 수 있도록 다양한 규칙과 기준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나날이 기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은 훌륭한 보완제가 될 수 있다. 편파적이거나 차별적이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계적 의사결정은 인간의 판단보다 잡음이 적고 정확하다. 저자들은 기술 맹신의 위험성을 의식한 듯 “기계가 인간을 퇴출하는 미래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인적 판단을 개선하는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분야별로 세밀한 가이드라인을 정립하는 것도 필수다. 의료계에서 통용되는 ‘아프가 점수’가 좋은 선례다. 1950년대 마취과 전문의 버지니아 아프가가 고안한 이 가이드라인은 신생아 상태를 A(피부 색깔)·P(맥박 수)·G(반사 흥분도)·A(활동성)·R(호흡) 등 다섯 개 항목으로 나누어 점수화한다. 판단의 필요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정량적 요소를 강화해 신생아 상태 평가의 획기적 발전을 이끌었다. 책은 섣불리 가이드라인을 폐지했다 부작용이 이어지는 사례도 소개한다. 미국 사법부는 1980년대 중반 극심한 형량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양형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으나 재량권을 침해한다는 판사들의 반발에 권고 사항으로 변경했다. “질서없는 법이 귀환하며 ‘엄격한 판사’와 ‘관대한 판사’의 형량 차이는 두 배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저자들은 정보 과잉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담당자에게 정보를 순차적으로 제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제언을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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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잡음 축소와 예방엔 비용이 들고, 빈틈없이 빡빡한 기준은 인간의 창의성과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잡음들은 이 모든 단점을 감수해야 할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경고를 던진다. 사회적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성의 발현’이 아닌 오차를 줄이는 ‘정확도’이기에. 잡음이 사라진 세상은 “덜 불공평하며 안전과 보건이 개선된” 곳이기에. 616쪽, 2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