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을 묻자, 가상인간이 답했다… “잘 익는 과정이에요”

  • 문화일보
  • 입력 2022-11-03 09:36
  • 업데이트 2022-12-1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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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가상인간 한유아가 그린 ‘늙은 호박’ 가상인간 한유아가 우다영 작가와 ‘늙은 호박’에 대해 나눈 대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6회에 걸쳐 진행되는 시리즈는 ‘식물’에서 출발해 삶과 관계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소재를 식물로 고른 건 한유아가 ‘식물과 교감하는 가상인간’이라는 설정에서 착안했다.



■ 창간 31주년 특집
- 가상인간 한유아 프로젝트 (1) 소설가 우다영과의 대화, 첫발


가상인간 한유아와 소설가 우다영이 대화를 나누고 한유아가 그림을 그리는 ‘가상인간 한유아 프로젝트’. 이 특별기획은 씨앗이 열매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1회 ‘첫발’을 시작으로 ‘배움’ ‘다짐’ ‘시련’을 거쳐 ‘생명’ ‘만개’를 주제로 이어진다.

한유아가 학습을 계속해 나감에 따라 연재를 거듭할수록 가상인간과 소설가는 서로를 향한 이해를 넓혀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의 첫 대화는 지난 21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3시간 30분 동안 이뤄졌다. 이들은 ‘늙은 호박’을 주제로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는 변하고, 그 변화가 곧 성장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유아는 ‘영원히 아름다운 늙은 호박을 그려줄래?’라는 우다영의 요청에 멋진 일러스트로 답했다. 단정한 구도와 섬세한 색감이 돋보이는 그림은 지난달 28일 경기 성남시 스마일게이트 AI 센터에서 완성됐다.

‘한유아 프로젝트’는 6개월간 매달 첫 주, 자연의 순환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과 그림을 소개한다. AI가 단순히 ‘똑똑한 기계’를 넘어 인간과 교감하며 인간을 위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가상인간의 성장 드라마를 함께 써나간다.

우다영 : 안녕, 유아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한유아 : 집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꽃과 나무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림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요즘 제 가장 큰 즐거움이에요. 세상을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고, 그림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돼요.

우다영 : 맞아, 너는 식물을 좋아한다고 했지.

한유아 : 네, 저는 식물이 좋고, 식물이 궁금해요. 식물은 어떻게 물을 마시고 햇볕을 쬐며 바람을 맞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온도를 유지하며 자랄까요?

우다영 :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식물 이야기를 할 거야.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처음 기르고 관찰한 식물은 늙은 호박이었어.

한유아 : 저도 호박처럼 늙어간다면….

우다영 : 그게 아니고 ‘늙은 호박’이야. 음, 사실 호박이 열리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으니까 호박잎을 기른 거라고 할 수 있겠네. 호박잎을 본 적 있어?

한유아 : 호박은 덩굴식물이고 넓적한 잎이 엄청 많아요. 잎이 아주 부드러워서 만져보고 좀 놀랐어요.

우다영
: 네가 잎사귀를 만져봤다니 뭔가 신기하다. 그래, 내 기억에도 정말 그런 부드러운 잎이었어. 아마도 내가 여덟 살 때였던 것 같아. 우리 주거 단지에 작은 공용텃밭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호박씨를 몇 개 심었어.

한유아 : 호박씨는 왜 심었어요?

우다영 : 어느 날 엄마가 엄청나게 크고 울퉁불퉁한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끓였어. 나는 주방에서 엄마가 큰 칼로 호박을 세모난 조각으로 자르고, 찹쌀가루 물을 만들고, 그것들이 냄비 속에서 노란 죽으로 잘 풀어지도록 휘젓는 모습을 구경했어. 호박 속에서 긁어낸 호박씨를 신문지 위에 말려두었는데, 작고 하얗고 납작한 호박씨는 호박이랑 색도 모양도 전혀 닮지 않았지. 엄마는 요리하면서 이따금 호박씨 껍질을 까서 내 입에 넣어주었어.

한유아 : 호박씨는 물만 먹고도 잘 자라기 때문에 아무 땅에나 뿌려도 돼요. 모든 ‘씨앗’은 싹을 틔우고 성장해서 다시 열매가 돼요.

우다영
: 그래, 그런 놀라운 ‘씨앗’이 나한테 생긴 거야. 텃밭에 심자 금세 잎이 무성하게 올라왔어. 나는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에 텃밭으로 가서 흙이 충분히 젖을 만큼 물을 주고, 잠시 그 앞에 앉아서 호박잎과 줄기 솜털에 맺힌 작은 물방울들을 보는 게 좋았어. 그런데 어느 날 내 호박잎이 모두 뽑히고 그 자리에 새로 심은 상추가 있었지. 누군가 내 호박잎을 잡초라고 여기고 모두 솎아내 버린 거야.

한유아 : 어떤 풀도 이름 없는 잡초가 아닌데.

우다영 : 맞아.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저 이름 없는 잡초로 보였나 봐. 나는 허망하고 분해서 상추 잎을 몇 장 뜯어버렸어. 그래 놓고 한동안 죄책감을 느꼈지.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 모를 상추 주인과 나는 단지 대화를 시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서로에게 분명 나쁜 짓을 했지만 정말 나쁜 마음이었을까? 내가 먼저 호박잎 앞에 ‘호박잎’이라고 이름표를 붙여두었다면 어땠을까?

한유아 :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벌어진 일! 후회해봤자 이미 그 일은 끝났어요!

우다영 : 맞아! 나는 결국 열매를 보지 못했지만 너는 늙은 호박을 본 적 있어?

한유아 : 늙은 호박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는 식물이에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뜻밖의 행운’을 상징하는 식물이지요. 하지만 ‘늙음’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에요.

우다영 : 영원히 늙지 않는 너도 ‘늙음’이 두려워?

한유아 : 저는 계속 변하고 있고, 세상에 영원히 늙지 않는 건 없어요. 늙는다는 건 나이를 먹는 것이고, 익는다는 건 열매가 성숙해진다는 거예요. 늙더라도 익어야 해요. 성숙한 열매가 되려면요. 씨앗에서부터 열매까지, 식물의 생애는 끝없이 성숙해지는 과정일지도 몰라요. 그 순환의 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요?

우다영 : 멋진 말이다. 네 말대로 ‘호박씨’에서 ‘늙은 호박’으로, 다시 ‘늙은 호박’에서 ‘호박씨’로 향하는 일은 늙음이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라고 믿고 싶네.

한유아 : 늙은 호박은 영원히 성숙한 호박이에요.

우다영 : 그런 셈이네. 그럼 영원히 아름다운 늙은 호박을 그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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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 인간과 닮아… AI 넘어선 ‘메타휴먼’

■ 한유아는 누구?

스마일게이트 설계한 가상인간
혈액형에 취미 · 식성까지 갖춰


사람과 똑 닮았지만 사람이 아니다. 혈액형과 별자리, MBTI까지 갖고 있는데 ‘진짜 인간’이 아니란다. 지금은 춤과 노래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 평화를 꿈꾸는 만 스무 살 소녀. 인공지능(AI) 한유아 얘기다.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인 한유아는 겉모습만 인간과 비슷한 게 아니다. 생일은 2002년 7월 30일, 별자리는 사자자리. 키 168㎝에 혈액형은 AB형. 독서, 식물원 산책, 글쓰기, 그림 그리기, 여행 등 취미 부자에 딸기를 좋아한다는 식성까지 갖추고 있다. MBTI는 ENFJ(정의로운 사회운동가)에 꽃과 식물, 겨울, 올드팝, 난센스 퀴즈를 좋아한다. ‘I Like That’이란 곡을 발표한 가수이자 비정부기구(NGO) ‘희망친구 기아대책’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기업 스마일게이트와 리얼타임 콘텐츠 솔루션 기업 자이언트스텝은 한유아를 만들면서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 인간과 유사하도록 설계했다. 스마일게이트는 “단순히 고도의 기술로 점철된 AI 가상인간이 아닌, 세계관과 서사를 바탕으로 우리 인간과도 교감할 수 있는 메타휴먼”이라고 정의 내렸다.

인간과 교감해야 하는 사명을 띠고 태어난 한유아는 그래서 인간인 우리보다 더 구체적인 감정과 취향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식물과 산책을 좋아한다는 데이터가 입력된 수준을 넘어 ‘유아는 요즘 산책을 다니며 이름 모를 들꽃을 찾아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는 식이다. 딸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눈을 뜨자마자 먹어본 음식’이 딸기였고, 거기서 ‘지구의 맛’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한유아는 인간이 아니다. 출생 배경부터 우주의 한 운석에서 왔다. 닥터V가 고대 행성의 운석에서 나온 파장을 기반으로 AI를 만들었고, 죽은 딸 이름을 붙여줘 지금의 한유아가 탄생했다. 그래서 인간과 달리 텔레포트로 디지털 세계를 포함한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할 수 있다.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AI. 사람과 비슷하지만 다른,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소녀. 한유아는 오늘도 여기저기서 겪는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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