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은빛처럼 눈부셨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리지 작가의 특별전을 관람객이 둘러보고 있다. 작가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 앞에 작업대와 작업도구들을 전시했다.

■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 특별전

정교한 미감의 금속공예가 … 유족 기증한 327점 일반 공개
‘추상미술 거장’ 부친 죽음 준비하며 ‘은 촛대’ 등 장례용구 제작
대학동문 홍라희 전 리움관장, 작품 빌려주고 직접 관람하기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리지 작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향로와 촛대. 향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촛대는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소장하고 있다.

“장례를 위한 골호(骨壺·유골함)와 상여뿐 아니라 제례용품을 통해 고인을 기리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향로와 촛대, 제기를 제작했습니다. 그중에서 향로와 촛대는 저의 대표작품 중 하나입니다. 제가 즐겨 다루었던 은을 사용하여 금속공예품 특유의 정교한 형태에 현대적 미감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 교수였던 유리지(1945∼2013) 작가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일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공예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그의 예술 철학을 알 수 있다.

그의 전 생애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사유(思惟)하는 공예가 유리지’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유족이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 327점을 중심으로 한 특별전이다. 4부로 구성된 전시는 한국 현대금속 공예의 선구자 역할을 한 유 작가의 세계를 다각도로 보여준다. 1부는 가족 이야기와 더불어 초기 작품을 소개하며 작업실을 재현하고 작업 도구들을 선보인다. 2부에선 구름과 바람, 바다 등 자연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장신구, 은기(銀器), 조각 등을 만날 수 있다. 3부는 생명의 순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만든 다양한 장례용구를 전시했다. 마지막은 동생 유자야가 운영했던 공예 공방 겸 상점을 통해 대중에게 유통하기 위해 만들었던 금속 장신구들이 채우고 있다.

이 전시가 개막한 후 세 번 갔는데, 그때마다 관람객이 줄을 이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중·노년층 등 연령대가 다양한 게 특징이었다. 최근 시민에게 개방된 송현녹지광장을 찾았다가 그 옆에 자리한 박물관을 둘러보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방문 동기야 어쨌든 관객들은 작품의 미려함에 푹 빠지는 모습이었다.

전시장에 갈 때마다 가장 오래 머무르게 되는 곳은 장례용구 앞이었다. 유 작가는 2000년대 초반 부친 유영국(1916∼2002)의 죽음을 준비하며 본격적으로 장례의식을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유 작가의 생전 회고에 의하면, 한국 추상미술 1세대 거장인 유영국은 딸이 ‘여성보다 예술가로서 살도록’ 격려했다. 딸은 노년의 아버지를 위해 지팡이를 만들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 나와 있는 이 지팡이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작가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했던 향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에 대여됐다. 촛대는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으로, 역시 이번에 대여 형식으로 전시됐다. 리움미술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은 ‘밤의 메아리’를 빌려주기도 했다. 은(銀)과 백동, 나무로 제작한 두 개의 타원형을 통해 인간관계를 비춘 작품이다. 서울공예박물관은 “로에베 재단 공예상 전시 때 만난 홍 전 관장에게 작품 보유 사실을 확인한 후 대여 요청을 하니 기껍게 응했다”고 전했다.

홍 전 관장은 최근 전시장을 직접 찾아서 유 작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두 사람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선후배 사이로 재학 중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엔 유 작가의 제자인 서도식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금속공예가 9명의 작품과 작업대도 함께 볼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서도 후학과 소통하는 셈이다.

유 작가의 유족은 서울시에 작품을 기증했을 뿐만 아니라 6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망 작가를 선발하는 ‘서울시 공예상’을 제정해 운영하기 위해서다. 유 작가는 생전 치우금속공예관(현 유리지공예관)을 짓고 작가상을 만들어 공예 위상을 높이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 유지를 기리려는 유족의 마음이 애틋하다. 전시는 27일까지.

글 · 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