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軍폭격에 집·논밭 잿더미… 할아버지의 나라서 행복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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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 탈출한 고려인 난민 875명 광주 정착 ‘고군분투’

안엘레나씨 “정착 도와줘 감사
韓국적 얻어 투표하는 게 목표”

김블라디미르군 “車엔지니어돼
캠핑카만들어 가족과 세계여행”

광주=글·사진 김대우 기자 ksh430@munhwa.com

“러시아군의 폭격에 집과 논밭이 모두 잿더미가 돼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정착해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17일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서 만난 고려인 동포 안엘레나(여·43·왼쪽 사진) 씨는 지난해 5월 아버지(70), 어머니(66), 딸(23)과 함께 우크라이나 미콜라이프를 탈출해 고려인마을에 왔다. 허리 디스크로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과 전쟁 포탄 소리에 청각을 잃은 딸을 홀로 부양하고 있다.

안 씨는 “오갈 데 없는 고려인들을 한국에서 받아주고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줘 너무 감사하다”며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투표권을 행사하는 당당한 한국인으로 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광주지역 사회에서 제공한 항공편으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고려인마을에 온 김블라디미르(17·오른쪽) 군은 올해 고등학생이 된다. 전쟁 통에 졸업장 등 학력 증명서를 가져오지 못해 입학이 어려웠지만 광주시교육청의 도움으로 3월부터 새날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새날학교는 고려인마을과 다문화가족 자녀들의 한국사회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2007년 설립된 대안학교다. 김 군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많이 낯설고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학교를 졸업하면 자동차 엔지니어가 돼 직접 만든 캠핑카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고 한국에 정착해 꿈을 이뤄가는 고려인 동포도 있다. 지난해 4월 한국에 입국한 박에릭(69) 씨. 우크라이나에서 제법 큰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했던 그는 광주 외곽 농촌마을에서 닭을 키우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있다. 박 씨는 “우크라이나에서 운영하던 양계장이 폭격을 맞아 모든 것을 잃었다”며 “한국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현재 광주 고려인마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875명의 고려인 난민들이 이주해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고려인마을에서 후원금을 모금해 마련한 항공편으로 입국했다. 입국자 중 80% 이상이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대한적십자사와 사랑의열매 등에서 지원한 임대보증금 200만 원과 두 달치 월세로 광산구 월곡동 일대 낡은 아파트나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다.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건설현장 일용직이나 농촌일손 돕기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신조야(67) 광주고려인마을 대표는 “고려인들은 각종 차별과 일자리 부족으로 전쟁이 아니었어도 우크라이나에서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한민족, 한핏줄인 고려인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적극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2004년 산업연수생으로 온 고려인들의 임금 체불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결성된 고려인공동체가 모태다. 현재 7000여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