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가르치고, 때론 응원하며… 일상을 보듬는 ‘한줄의 카피’[정신과 의사의 서재]

■ 정신과 의사의 서재

한 세대 전까지는 분위기에 맞는 시 한 소절 낭송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머릿속에 시가 아닌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국물이 끝내줘요”는 20여 년이 지났지만 입안에 맴돌다 불쑥 튀어나온다. 상황을 압축적으로 간결하게 정리해주는 데 카피 한 문장만 한 것이 없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에게 시는 카피가 아닐까.

팔고자 하는 제품, 알리려는 메시지를 최대한 알리려는 상업성의 농축물이지만 그 시기의 문화에 첨예하게 반응하고, 또 어떤 문장은 인생을 돌아보는 통찰을 준다. 같은 장면에서 시작하더라도 미국 드라마는 테러에 맞서 싸우고, 한국은 연애를 하고, 일본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한다는 우스개가 있듯이, 그중에서도 일본의 카피들은 그저 상품을 광고하려는 것만은 아닌 듯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경우가 많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규영은 오래된 것부터 최근 것까지 일본 광고 카피를 번역해서 SNS에 올렸고 ‘한 줄 카피’(포르체)라는 책으로 묶어서 냈다. 일본 광고를 소개하며 연상된 생각을 에세이로 쓴 책으로는 이시은의 ‘짜릿하고 따뜻하게’가 내게는 독보적인 책이었는데 이 책에서도 흥미로운 문구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응원하는 일본다운 카피가 먼저 눈에 띈다. ‘습관이 된 노력을 실력이라 부른다’ ‘어제의 나를 오늘 조금 뛰어넘는다. 모든 꿈은 반드시 그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뭘 광고하는 것일까? 도쿄대 100명 합격 같은 노골적 노출이 아닌 은근한 응원으로 압박을 하는 학원의 광고 카피다. ‘여름으로부터 도망친 자는 변명을 말한다. 여름과 싸운 자는 꿈을 말한다.’ 이것은 학원 여름 특강 광고문구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 ‘지켜본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응원이다’라고 수험생용 에너지바 광고가 대변해준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는 좌절하고 방향을 잃고 혼돈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 이때 청년을 위한 기간제 철도티켓 청춘18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모험이 부족하면 어른이 될 수 없어’ ‘처음에 나이 제한은 없다’고, 또 이어서 ‘20살은 어른으로 0살. 넘어지고, 주저앉고, 당연하잖아’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벽이 아니고 문일지도 몰라’라는 카피 한 줄도 마음에 든다. 일어나서 다시 나아갈 힘을 준다.

한 일상용품 회사는 ‘행복은 이름도 없는 하루에 담겨 있다’면서 자기 제품을 사용하는 평범한 하루가 실은 행복한 날들이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어디서 한번 명언 같이 써먹기 좋은 문장들이다. 광고하려고 만든 말들이나 충분히 삶 전체로 넓혀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크게 소리 내거나,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조곤조곤 일상의 언어로 구성된 카피들, 마음에 담아둘 몇 개의 문장만 건진다면 한 권의 책이 해낼 역할로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