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삶과 문학은… 민족사 아픔 딛고 피어난 한국 현대시의 축복[추모합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014년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찍은 사진은 내게 귀한 보물로 남았다. 오른쪽부터 일본 시인 혼다 히사시, 필자(권택명), 김광림 시인, 김상호 대만 슈핑대 교수(김 시인의 3남).

■ 추모합니다
김광림 시인(제28대 한국시인협회장·1929∼2024)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신 원로 시인 김광림(본명 충남) 선생님이 지난 6월 9일 향년 95세로 별세하셨다. 11일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영결식이 있은 후 6·25전쟁 때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 소대장(소위)으로 참전해 은성화랑무공훈장을 수장하고 육군 대위로 전역한 국가유공자로서 서울 현충원에 봉안되셨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1969년 내가 외환은행 대구지점에 근무할 때, 당시 선생님이 서울 본점에서 편집하시던 사보에 투고한 졸시를 칭찬하신 엽서로 시작됐다. 그 후 시와 삶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등단과 첫 시집 출간까지 보살펴 주셨다. 지난 55년간 시협과 아시아 및 세계시인회의 등의 일로 선생님을 보필하고, 국내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선생님은 1929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평양 종합대에 입학하지만, 북의 체제에 반발해 만 18세 때 모친께만 말씀을 드리고 혈혈단신 월남하신 ‘이산가족’이다. 선생님이 살아내신 95년 생애의 앞부분은 일제강점기, 제2차 세계대전과 8·15 해방정국, 6·25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 4·19, 5·16 등 숨 가쁜 격동기였으며,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아픔과 고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그 한가운데를 단신의 실향민으로서 초등학교 교사, 잡지사 직원, 군인, 공무원, KBS 직원, 은행원, 대학교수로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도, 무엇보다 시인으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으셨다. 생사를 건 월남을 비롯한 자신의 선택을 ‘시를 위한 나의 편력’이라고 하실 정도로, 선생님에게 시는 곧 ‘목숨’이고 ‘구원’이었다.

선생님의 문학적 성취는 널리 알려진 대로, 월남 이후 1948년 당시 연합신문 독자란에 발표된 ‘문풍지’로 데뷔한 이래 1957년 전봉건, 김종삼 시인과의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출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로부터 전후 한국 현대시에서 명징한 이미지와 뛰어난 언어미학으로, 박남수 시인 등과 더불어 ‘주지적 서정시’ 또는 ‘신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연 탁월하고 철두철미한 시인이셨다.

아울러 선생님은 일찍이 여러 차례의 아시아시인대회, 세계시인회의 개최와 참여 등으로 일본, 대만, 중국, 몽골 등 동아시아를 비롯, 국경을 넘은 시와 시인들 간의 교류를 통해 한국 시의 지평을 넓히셨다. 자신을 ‘코즈모폴리턴’으로 칭하신 적도 있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 결과 본인 번역에 의한 일본어 번역 시집을 비롯해 일본 시인 30명이 김광림 시인과 작품에 대한 글들을 모아 엮은 ‘한국의 율리시즈 김광림’이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과 대만에서 김광림 시인은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한마디로 선생님의 삶과 문학은 민족사의 아픔을 딛고 피어난 인간 승리의 위대한 발자취이고, 한국 현대시의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건 탈출로 인해 간난신고를 겪고 평생을 부모 형제와 고향을 그리워하다 떠나셨지만, 그로 인해 한국 현대시가 빛나는 하나의 성취를 이뤘다는 데서 가슴 아픈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한다. 선생님께서 꿈에도 그리시던 남북통일과 고향 방문, 북녘의 부모님과 형제자매 상봉을 못 하신 채 눈을 감으신 것이 애통하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에 김광림 시인을 ‘한국의 오빠’라고 부르며 국적을 넘어 오랜 우정을 나눴던 일본의 유명 시인 시라이시 가즈코 여사가 선생님보다 5일 뒤인 6월 14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혼이라도 북녘의 가족 상봉과 더불어 동시대를 산 한·일의 오누이 시인도 반가운 해후를 하시게 되기를 바라며, 6·25를 앞둔 보훈의 달에 별세하신 선생님의 평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권택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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