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여성논객의 통렬한 반성… “저항은 계속돼야 한다”[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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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록산 게이 지음│최리외 옮김│문학동네

페미니즘 열풍 주역‘록산 게이’
10년동안 쓴 칼럼 모아 책출간

반복되는 극단 정치·인종 문제
그에 맞선 분노는 나쁜게 아냐

“좌절만 하면 가능성마저 잃어
멈춰서고 싶지만 멈추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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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성이다. 그는 미국에 사는 흑인이고 아내인 데비와 함께 살고 있는 양성애자다. 인종과 젠더, 성 정체성까지 소수성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글로 풀어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2014년 “주요 페미니스트 고전으로 읽히지도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내놓았던 그의 페미니즘 저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주목과 함께 무분별한 비난도 커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한 편의 글 속에서 가장 대담하고 또 재치있게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그 이름은 록산 게이다.

지난 십 년간 미국의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록산 게이는 때로는 스스로가 “의견 자판기”라고 여겨질 정도로 페미니즘과 흑인 인권, 소수자에 대해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미국 사회에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킨 그의 대표작이자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나쁜 페미니스트’는 성역과도 같았던 페미니즘의 벽을 넘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페미니즘’을 제시했다. 핑크색을 좋아하고 여성 혐오적인 가사의 힙합을 흥얼거리는 자신을 ‘나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쁘고 불완전하더라도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여기서 나아가 그는 ‘헝거’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자신을 소개했다. 열두 살 무렵 동네 남자아이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해 그는 아무도 자신을 손댈 수 없도록, 자신의 몸을 채우고 살찌워 자신을 스스로 몸에 가뒀던 유년 시절을 복기한다.

흑인 여성에서 나아가 이제는 하나의 신체에 대해, 외부에서 경멸하거나 조롱하는 비만인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서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세계를 확장했다.

록산 게이가 지난 십 년간 가디언, 뉴욕타임스와 같은 지면에 쓴 칼럼을 모은 이 책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앞서 소개한 책은 물론 팟캐스트, 방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의견을 내왔던 순간의 후일담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의견에는 돌아오는 책임이 있다. 책임은 곧 응답하는 능력, 의견이 만들어낸 또 다른 발화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삶에서 중요하다. 앞서 그가 ‘나’에서 출발한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로 세상에 다가갔다면 이 책에서 그는 대중에게서 돌아왔던 응답과 사회의 반응, 책을 저술한 이후 벌어진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재응답에 나선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저자는 글에서 가장 용감하고 대담해진다. 책에서 그는 성폭력 범죄자의 예술 작품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범죄자들에 대한 용서는 “신물이 난다”고 비판한다. 특히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대해서는 “실로 고통스럽고 불편한 시절”이라며 화를 낸다. ‘나쁜 페미니스트’를 표방했던 그는 이제 ‘화난 여성’이 됐다. 그러나 분노는 본질적으로 악한 감정이 아니다. 거리에 나선 많은 이들은 용감하게 분노를 통해 불만을 표했듯이, 그리고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화를 냈을 뿐이다.

인간은 늘 그렇듯 변하고 나아간다. 또 후회하고 성찰하기도 한다. 책에서 보여준 저자의 모습은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다. 2016년 클린턴 후보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운동을 펼치지 않았던 그는 트럼프의 당선을 바라보면서 “뒤돌아보니 저항은 적극적이고 꾸준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고 통렬하게 반성한다. 나쁜 페미니스트 출간으로부터 4년, 그는 “책임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불러오는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며 “더 나은 것을 요구하지 않은 채 문제적인 대중문화를 계속 소비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몇 년에 걸쳐 쓴 기록 속에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너무 많은 흑인이 총에 맞았고 목숨을 잃었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반복되는 사건 속에선 피해자의 이름만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라는 구호 아래 외쳤던 인종 문제는 여전하고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한 사회를 마주하며 그는 분노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나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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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록산 게이는 희망이나 구원, 행운과 같은 쉬운 단어들을 말하지 않는다.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환경과 자꾸만 죽는 여성과 흑인들을 보며 희망보다는 가능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구원보다는 안전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잠시 멈춰 서고 싶어진다”지만 책임에 대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용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멈출 수가 없다. 그가 말했듯이 사회는 ‘진공상태’가 아니다.

책에 담긴 그의 기록은 2023년에 멈춰 있지만 시대는 흐르고 있다. 그토록 저주하던 트럼프의 재당선에 그는 다시 한번 좌절했을까. 구원을 바라지 않는 그는 가능성에 대해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저자는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부터 1달 뒤 2020년 6월 아마존의 인공지능(AI) 비서 프로그램 알렉사에게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흑인 인권 운동을 학습한 알렉사는 이렇게 말했다. “흑인의 생명은 중요합니다. 저는 인종 평등을 믿습니다.” 록산 게이가 믿는 가능성은 이런 것이다. 436쪽, 2만2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