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노벨상 이후가 중요… ‘K-강좌’ 해외 학자·학생 지원을”[M 인터뷰]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권영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한국현대문학비평사’ 등 저서를 배경으로 한국 문학사를 체계화하고 해외에 알리는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박윤슬 기자

■ M 인터뷰 - ‘경암상’ 받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문학·비평사 가치축적 필요
교육·번역시스템 등 체계화해야

1985년 하버드 강좌 개설했더니
첫날엔 아무도 안와… 폐강될 뻔

北은 중요 출판물 美대학에 기증
김일성大서 쓰는 교재까지 비치

일제시대·월북문학 등 의의 주목
버클리·도쿄대·산둥대서 강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가 있었지만, 한국문학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한국 근현대문학사 연구와 문학비평의 권위자이자, 미국 하버드대와 버클리대, 일본 도쿄(東京)대 등 해외 명문대에 한국문학 연구 초석을 놓았던 권영민(76)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한국문학이 더 발전하려면 우리 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해외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학자들과 한국을 배우려는 학생들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일 국내 연구·학술 분야 최고상으로 꼽히는 ‘경암상’을 수상했다. 시상식 전날인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경암상을 포함해 그간 받았던 많은 상 중에 특별히 뜻깊은 상이 있다면.

“2017년 미국에 있을 때 우리 정부에서 주는 세종문화상(학술 부문)을 받고 큰 힘이 됐다. 그 뒤로 이번 경암상이 정말 영광스러운 상이다. 경암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한국의 노벨상’이라고 했다. 인문학자에게 기회가 올까 했는데, 한국문학과 문화를 외국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력해온 게 평가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기쁘다. 우연히도 제가 경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시점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온 때가 비슷해 더 뿌듯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문학이 더 발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노벨상 수상은 한국문학이 세계에서 제대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인도, 미국, 중국 등에서 한국문학, 한국문화 등을 가르치는 외국 학자들도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라.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노벨상 이후인 지금부터다. 한국문학의 수준과 깊이를 말해주는 ‘가치 축적’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한국문학이 체계화돼 있어야 하고, 국내에서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나오고 좋은 작품이 많이 번역돼야 한다. 또 한국문학을 이해하는 외국의 고급 독자층이 두꺼워져야 한다. 그러려면 해외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학자들, 그들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지원해줘야 한다.”

―고은 시인, 황석영 소설가 등도 노벨상 후보로 오랫동안 거론돼왔으나 수상하지 못했는데. 한강 작가와 차별점은 무엇일까요.

“고은, 황석영, 이문열 등 작가들은 한국의 특수성을 부각하는 데 성공했지만, 인류적 보편성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확 열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한강 작가는 똑같이 역사적 비극이나 고통을 소재로 하면서도 독자들이 보편적 가치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채식주의자’를 보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개인적 선택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가부장적 폭력 문제를 충격적으로 그려냈다.”

―서울대 재학 중에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엄청난 독서광이었고, 문필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시골의 작은 고등학교에서 서울대 국문과를 지원해 운 좋게 합격했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글 쓰는 곳이 아니고, 한국어·한국문학 연구자를 양성하는 곳이라는 거다. 목표가 사라져 버렸지만, 책 읽는 데는 공력을 어마어마하게 들였다. 대학 다닐 때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학문이 언어학을 중심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국내에 관련 서적이 없으니 영어로 된 책을 구해 읽었다. 학부 졸업논문을 100매 정도 쓰면 되는데, 나는 한 500매 썼다. 그중 한 부분을 잘라내어 85매짜리 평론을 신문사에 냈다. 문학작품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평론이 거의 없던 시기라 그게 뽑혔던 것 같다. 그때 가명으로 소설도 한 편 냈는데 평론만 당선됐다. 졸업을 앞둔 1971년 1월의 일이다.”

―평론과 함께 한국 근현대문학사 연구가 핵심적인 업적인데, 이 길을 택한 이유는.

“1972년 석사과정에 들어가 1975년에야 졸업했다. 오래 걸린 대신 엄청나게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 가서 1900년대부터 나온 작품을 조사하여 카드에 목록으로 정리했다. 서울대 도서관에 있는 서적을 두루 살펴보고, 신문자료를 검토하고 국립도서관 자료도 보고. 오후 3∼4시만 되면 가방에 카드만 잔뜩 넣고 도서관에 갔다. 국립도서관 정리가 끝난 다음에는 고려대, 연세대 도서관에 있는 책도 조사했다. 광복 이전까지의 자료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후 그걸 기반으로 문학사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모교 교수님들도 내가 공부하는 방식을 좋게 봐주셔서 1981년에 서울대 교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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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문학사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시기를 꼽는다면.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계급문학운동이 유행했다. 과거에는 이걸 사회주의 운동으로 봐서 이념적 성격을 문제 삼아 배제하려 했는데, 나는 그것을 일제 식민지 정책에 맞서는 반식민적 성격의 민족주의 운동과 계급주의 운동으로 대등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내가 특히 주목한 대목은 광복과 미 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른바 해방공간의 문학이다. 이 시기에 문학이 이념적으로 분열돼 일부 문화예술인들이 월북했다. 예전에는 월북문인의 이름조차 얘기하면 안 됐다. 서울대에 부임하면서 처음 낸 책이 ‘한국근대문학과 시대정신’인데, 나는 해방공간 지식인의 이념 선택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다. 그런데 책이 나오자마자 ‘불온문서’로 낙인찍혀 인쇄된 책과 지형이 모두 압수됐다. 이를 걱정하시던 학과 원로 교수님들이 당시 서울을 방문한 하버드대 교수한테 나를 하버드대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하버드대에서 초청장이 왔고, 1985년 여름방학 때 출국하는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5월에 ‘불법 불온 문서 및 유인물 목록’이 발표돼 신문에 도배가 됐다. 불법 서적을 만들고 유포한 사람들을 조사해 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거다. 그래서 6월 초로 출국을 앞당겼다.”

―당시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의 시선은 어땠는지.

“하버드대에 가서야 나는 비로소 한국문학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보게 됐다. 세계 최고 대학인데 한국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국문학 교수가 왔다고 시범적으로 한국문학 강의를 개설했는데, 첫날 강의실에 아무도 안 왔고, 다음 시간에는 한 명이 왔다. 이 학생이 친구를 설득해 2명이 됐다. 또 보스턴에 있는 다른 대학에서 동양문화사를 가르치는 교수 한 분이 청강하겠다고 왔다가 ‘특별학생’으로 수강신청을 해줘서 겨우 폐강을 면했다. 이게 미국 본토에서 한국문학 정규강좌가 개설된 첫 사례였다. 하버드대에 큰 동양학 도서관이 있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 관한 연구 서적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북한 현대문학 분야에서도 전문가로 꼽히시는데.

“놀랍게도 북한은 연간 출판 목록집과 함께 중요한 출판물을 모두 하버드대 도서관에 기증했더라. 1950∼1980년대 북한에서 나온 책들이 대부분 비치돼 있었다. 해방공간에 월북한 작가들의 소설, 시집도 다 있더라. 김일성대학에서 가르치는 문학 교재까지 있었다. 나는 틈틈이 노트에 적어 목록을 만들어뒀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학과의 정한모 교수님이 문화공보부 장관이 됐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이념적 개방이 크게 문제시됐던 때다. 월북문인의 작품 활동 내용을 정리해 장관실로 보내드렸다. 올림픽 직전에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내가 그 방면을 가장 많이 정리한 사람이 됐다.”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지금까지 하고 계신다.

“1990년대 중반에 2년간 미국 버클리대에 가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면서 한국학 프로그램을 만들고 돌아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후 일본과 문화교류가 시작될 때 일본 도쿄대의 초청을 받았다. 도쿄대 문학부에 ‘한국문화연구과정’이라는 대학원 과정 개설을 준비하면서 교과과정을 구성하고 그 계획을 평가하는 작업을 도왔다. 2004년에 하버드대에서 가르쳤고 2007년에는 도쿄대에서 직접 강의했다. 2012년 서울대에서 퇴임하고, 단국대 석좌교수로 2년간 근무한 뒤 다시 버클리대에 갔다. 2014∼2022년 8년간 한국문학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버클리대 일이 끝나자 중국 산둥(山東)대에서 연락이 왔다. ‘국제동아시아연구원’을 만들려는 계획으로 5년 계약을 했다. 지금 1년의 절반 정도는 중국에 머물고 있다. 올 9월부터 한국학 강좌를 운영 중인 중국의 여러 대학을 돌며 강연도 시작했다.”

―올해 6월에는 1000쪽에 달하는 ‘한국현대문학비평사’ 책도 내셨다.

“문학사를 정리하고 남은 숙제가 비평사였다. 서울대 퇴임 전에 마무리하지 못해 버클리대에 가 있는 동안 틈틈이 정리했는데, 그게 올해 책으로 나왔다. 기존 비평사 연구는 대개 논쟁사를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개념사 중심으로 비평사를 기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개념이 들어와 기존 관습과 충돌하면서 우리 것이 된다.”

―지난해 서울대 도서관에 ‘권영민 문고’가 만들어지는 등 희귀본 자료를 많이 수집하신 것으로도 유명한데.

“서울대 도서관 개인 문고에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일제강점기의 문학 자료들, 대학원 시절 청계천에서 샀던 희귀본, 옌볜(延邊)·홍콩·일본 등을 다니며 모은 북한 문학책, 1950∼1990년대 시집 등 1600여 권을 보냈다. 직접 모은 희귀본 중 이광수 소설 ‘무정’ 5판(1924년)은 현재 남아있는 책 5권 중에 들어간다. 염상섭의 ‘만세전’ 초판본, 현진건의 ‘조선의 얼굴’ 초판본, 정지용의 ‘백록담’ 초판본, 월북작가 임화의 평론집 ‘문학의 논리’도 있다.”

―문학을 공부하거나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많은 작품을 읽는 게 문학 공부의 출발이다. 많이 읽어야 필력도 생긴다. 제자들이나 후배들, 젊은 교수들한테 늘 ‘텍스트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많이 읽은 사람이 승리한다’는 얘기를 한다. 지금도 나는 컴퓨터에 한국 근대문학 자료들을 PDF 파일로 보관해 두고 열어보고 있다.”

김성훈·이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