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치우기[유희경의 시:선(詩: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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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 수 없는 몸을 가진 사람들/ 스스로의 위치를 들키며 걸어간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잠시나마 이곳으로 올까// 길게 늘어진 발자국과 끝이 없는 길/ 주변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고// 누군가 시작한 걸음을/ 누군가 끝내며// 반복되는 풍경’

- 차유오 ‘녹지 않는 겨울’(시집 ‘순수한 기쁨’)

눈이 오는데, 덜컹 마음 먼저 내려앉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아니 더는 아이가 아니라는 의미. 눈길 미끄럽겠다. 얼어붙은 습설은 위험하겠다. 손님이 없겠구나. 걱정을 하면서도 하얀 창밖을 건너다보며 슬쩍 설레는 건, 그래도 아직 내 안의 아이가 살아 있다는 의미.

눈을 쓸어내는 건 서점을 운영하는 이의 중한 임무이면서, 남모를 기쁨. 이럴 줄 알고 두툼한 바지를 입었지. 물이 새어들지 않을 튼튼한 신발을 신었고 여벌 양말도 챙겼지. 서점 운영 9년 차의 연륜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장갑을 낀다. 눈을 쓸어내는 데 싸리비만 한 것이 없다. 물론 넉가래도 함께 준비해야지. 눈은 낙엽과 달리 무거우니까 말이다. 도로 위 눈은 이미 녹았다. 염화칼슘을 뿌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다지만 마음이 쓰인다. 환경에 좋을 리 없다. 당연히 우리 몸도 해할 것이다. 길고양이들의 맨발에 화상을 입힌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다. 차라리, 모두 함께 눈을 치우면 어떨까. 출근도 등교도 미루고 아침 일찍 모두 모여서 다 같이 눈 치우기. 순식간에 해결될 텐데. 재밌기도 할 것이며, 낯 모를 이웃과 자연히 눈 마주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곤 한다.

실은 ‘눈치우기’는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던 출판사의 이름이다. 고된 일도 함께하면 의미가 되고 즐거움이 된다는 뜻을 담았었다. 각자 바빠지고 이러저러한 일도 있어 흐지부지되었지만, 지금껏 해왔던 일 중 가장 근사한 일이었다. 눈 치우기. 우리를 진짜 우리로 만들어줄 일의 이름.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