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약자 목소리 고찰… ‘10권의 통찰’ 우리 사회를 말하다[북리뷰팀이 선정한 ‘올해의 책’]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나열된, 문화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낸 책들을 엄선했다. 윤성호 기자

■ 북리뷰팀이 선정한 ‘올해의 책’

정치 양극화, 소외되는 약자의 목소리, 그리고 과거의 기억. 2024년 문화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은 우리 사회를 오롯이 담았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상기시키는 책들이 유독 눈에 띄는 한 해였다. 올 한 해 북리뷰 지면을 통해 소개된 책을 중심으로 북리뷰팀 기자들이 10권의 책을 엄선했다.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경고와 진정한 보수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때마침 적절해 보인다. 돌봄 노동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일본의 연구, 사회에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는 영국의 연구 등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준다. 또, 우리 역사 속 과학자들을 재조명한 연구서와 여성 문학의 계보를 재정립한 선집, 올해 가장 주목받은 신인 작가의 소설집까지. 다시 읽고, 묻고 답하며 새해를 준비할 시간이다.

슬픔 속에도 유머가… 우리 일상 같은 이야기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문학동네

2022년 등단한 작가의 첫 소설집. 각각 이상문학상 우수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작가의 첫 책이지만 5만 부 가까이 판매됐으며 신동엽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해 준비된 작가의 새로운 언어를 문단에 각인시켰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티케팅에 실패했어도 게릴라 콘서트를 기대하며 콘서트장을 서성이는 팬(‘세상 모든 바다’)이거나 유명 연애 프로그램의 참가자(‘롤링 선더 러브’) 등이다. 그들이 겪는 사건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그 점이 강점이다.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불러낸 인물들은 평범하기에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어나지 않은 재앙들을 걱정하는 어떤 한 사람(‘팍스 아토미카’)의 마음이 바로 2024년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독자들은 자화상을 보듯 씁쓸함을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번 편 책을 좀처럼 덮지 못하도록 만든다.

주변 문학으로 치부된… 여성작가들 집중 조명

■ 한국 여성문학 선집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민음사

국문학 연구자 김양선(한림대), 김은하(경희대), 이선옥(숙명여대),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경희대), 이희원(서울과학기술대), 시 연구자 이경수(중앙대) 교수가 12년 동안 치열한 고민과 토론을 거쳐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100년사. 총 7권으로 구성된 선집은 개화기 양반 계층 여성인 이 소사와 김 소사가 신문에 투고한 ‘여학교설시통문(1898)’과 ‘부인회 애국가(1898)’를 여성 근대문학의 태동으로 짚는다.

이후 줄곧 주변부 문학으로 치부돼 온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문학사의 한복판으로 불러낸다. 1930년대 통속 소설이라며 비판받던 김말봉의 ‘찔레꼿(꽃)’을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냈다는 관점에서 새롭게 읽고 사회주의 계급소설로 분류되던 박화성의 소설도 젠더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또한 박순녀와 이정호의 1960년대 소설을 전후 시대의 시대 정신으로 복원한다.

마침내 1980, 1990년대를 다루는 6권과 7권은 여성 문학의 폭증을 드러낸다. 최승자, 김혜순, 은희경, 한강의 작품, 작품세계에 대한 해설이 함께 묶였다.

日 고령사회 사례로… 미리 보는 한국 사회

■ 돌봄의 사회학
우에노 지즈코 지음│오월의봄

노인 인구 1000만 명 시대를 코앞에 둔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사회적 현안이다. 올 한 해 돌봄을 주제로 한 다양한 책이 출간됐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책이다.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가 900쪽이 넘는 분량으로 쓴 고령자 돌봄에 관한 책은 한국보다 먼저 고령사회를 경험한 일본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조망할 수 있다.

책은 2000년 4월 일본에서 시행된 개호보험제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본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인 개호보험의 도입은 가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고령자에 대한 돌봄 책임이 공적 영역으로 이동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저자는 제도 도입 이후 10년간 일본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현장 연구를 통해 발견하고 장애인·유아·고령자가 함께 거주하는 ‘공생 돌봄 시설’과 같은 새로운 형태에도 주목한다.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등의 저서를 펴내며 오랜 기간 돌봄 문제를 연구해 온 저자인 만큼 돌봄 노동의 저변에 있는 사회적 의미를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게 한다.

장애인 무용수도… 무대위에선 모두 평등

■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문학동네

장애인 무용수, 작가, 변호사라는 다양한 직업 정체성을 밑바탕에 두고 신체와 장애에 대해 써온 김원영 작가가 6년 만에 출간한 단독 저서. 주목받았던 전작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펴낸 후 신체가 두드러지지 않는 변호사의 삶을 뒤로하고 무대에서 몸으로 말하는 무용수의 길로 나아간 그의 경험은 풍부해졌고 글은 한층 더 유려해졌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몸’에 대해 가장 냉정한 곳 중 하나로 공연 무대를 꼽는다. 신체적 조건이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험대인 만큼 오랜 기간 이곳은 건장한 몸을 가진 이들이 활개 치는 장소였다. 무대에 장애인 예술가가 오른 초창기 사례인 ‘프릭쇼’가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들을 전시했다면 이제 뇌성마비와 언어장애를 가진 연극배우들은 비장애인 배우들과 함께 공연에서 온전히 존재한다. 책은 발레리나의 32회전 동작과 김원영의 기는 동작은 차별적이지만 이들이 우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동시에 평등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일제 ~ 해방 이후까지… 숨은 과학 영웅 소개

■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김근배·이은경·선유정 지음│세로북스

예년과 달리 대중 과학서의 인기가 줄어든 올해, 그간 다뤄지지 않던 한국의 근현대 과학사를 조명한 책이 나왔다. 김근배 전북대 교수를 비롯해 연구진이 15년간 한국의 근현대 과학자들에 관해 연구한 끝에 그 첫 결과물이 나왔다.

책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공백의 역사로 남았던, 그러나 우리나라 과학의 토대를 만든 과학자 가운데 30명을 소개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해 네브래스카대 화학과에 진학한 한국인 첫 화학자인 리용규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세계 최초로 비타민E 결정체 추출에 성공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 김량하, 최근 타계한 위상수학의 권위자 권경환까지 낯설지만 기록돼야 할 인물들의 성취와 생애를 사진과 함께 담았다. 격동의 시기였던 해방 전후의 시기에 이들의 이름은 좌우 이념 대립, 정치 활동과 같은 이유로 삭제됐다. 김량하는 해방 후 여러 정치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숙청을 당했고 ‘나비박사’로 불린 석주명은 평안도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오인돼 길에서 총을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24 문화일보 올해의책. 윤성호 기자

英 좌파 자유주의자… ‘보수주의 역사’ 추적

■ 보수주의
에드먼드 포셋 지음│항아리

영국의 정치 저널리스트가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네 나라에 초점을 맞춰 보수주의의 역사를 추적했다. 책은 자유주의를 떠받치는 힘으로 보수주의의 역할을 강조한다. “보수주의의 친구와 적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호평받았는데, 이는 저자가 ‘강경우파’와 보수주의를 구분하고, 온건 보수주의는 생존해야 한다며 그 당위성을 설파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받아들이며 지난 두 세기 동안 급진주의나 사회주의보다 우위를 점했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며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손잡은 후엔 선거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 책이 매력적인 보수주의자로 영국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전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을 꼽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중산층의 정서를 잘 파악했던 디즈레일리 전 총리를 “완벽한 귀”라고, 분열된 목소리까지 꼼꼼하게 챙겼던 레이건 전 대통령을 “섬세한 귀”로 평가했다. 즉 보수주의 정치, 아니 모든 정치의 성공은 늘 경청의 태도와 직결됐던 것이다.

괴물의 예술을 사랑한… 팬들의 무거운 딜레마

■ 괴물들
클레어 데더러 지음│을유문화사

‘괴물 같은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자는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MeToo) 운동이 단순히 예술계를 장악했던 괴물들의 파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만들어 낸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괴물의 의미를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예술을 예술만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재정의한다.

저자는 미투 운동이 꺼내놓은 무거운 질문에 이론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혹시 나도 괴물일까?”라는 성찰에서 시작해 무수한 성희롱과 성폭행 위기를 넘어 생존한 삶을 고백한다. 한 명의 예술 감상자로서 내놓는 이야기들은 저자와 독자 간의 간격을 좁힌다.

그럼에도 저자는 인생의 한 부분에 깊이 박혀 있는 괴물들의 예술을 말끔히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책을 덮은 뒤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지금껏 괴물들의 민낯을 알면서도 그들의 작품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 눈감았던 산업을 바꿔내자고 말한다. 괴물들을 앓지 않는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대물림되는 富·성공… ‘계급의 종말’은 없다

■ 계급천장
샘 프리드먼·대니얼 로리슨 지음│사계절

영국과 미국의 두 교수가 함께 쓴 책은 신분 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모의 재산, 지위, 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영국사회의 다양한 지표를 조사·연구한 후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다수가 특권층 출신이며, 그 성공은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책은 영국 노동력조사 자료에 나타난 개인 10만8000명, 엘리트 직종 종사자 1만8000명의 부모 직업을 전문직 및 경영직(특권층), 중간직(중간계급), 노동계급으로 나눈 후 자녀 직업을 살폈다. 하층 출신은 의료 등 엘리트 직종에 종사할 확률이 특권층보다 약 6.5배나 낮았다. 반면, 특권층 자녀들은 상위 직급에 도달할 확률이 2배 이상 높았다. 책은 이를 ‘계급천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에서 따온 말로, 신분 이동을 방해하는 사회문화적 요인을 뜻한다. 저자들은 엘리트 직업 내 출신 계급을 정기적으로 파악해 천장 효과를 유발하는 요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부모 찬스’가 작동하기 쉬운 무급 인턴십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극단주의자 무기가 된… 민주주의 허점과 한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어크로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두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의 신작은 많은 독자가 출간을 기다려왔다. 전작을 통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중심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짚어냈던 이들은 그로부터 6년 후, 이번엔 2021년 트럼프의 낙선 이후 파괴된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를 날렸다.

책은 2021년 1월 6일 대선 패배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가 감행한 국회의사당 습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권력이 평화롭게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이양된 최초 사례가 미국이라는 아이러니를 짚으며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갈등의 배경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짚어낸다. 책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잡음 없이 패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여겨질 때, 그리고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트럼프의 재당선으로 또 한 번의 정권 교체를 앞둔 지금 민주주의는 시험대에 올랐고 책을 읽어볼 또 하나의 이유가 추가됐다.

윤치호·뮈텔·정교… 5명이 쓴 대한제국사

■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김태웅 지음│휴머니스트

대한제국 시기는 종종 책을 통해 다시 소환된다. 외세의 침략과 몰락을 겪은 시대인 동시에 민중의 저항과 개혁의 몸부림이 있었던 만큼 다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흥미로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비롯해 다양한 책이 출간됐지만, 그중에서도 이 책은 당대에 실존했던 5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수립부터 국권 상실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저자인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선정한 다섯 인물은 각기 다른 특징이 있다. 윤치호는 개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금의 정치인에 해당하고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주교인 귀스타브 뮈텔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황현은 지식인이며 정교는 언론인, 마지막으로 지규식은 평범한 백성을 대표한다. 서로 다른 인물들은 대한제국의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데 이들이 모두 기록을 남긴 덕분에 우리는 망국의 역사를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한 나라의 위기가 그 백성의 위기가 될 수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신재우·장상민·박동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