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리셋 위한 ‘좋은 위기’로 만들자[시평]

여한구 美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선임연구위원, 前 통상교섭본부장

오는 20일 시작될 트럼프 스톰
세계에 탄핵과 항공 사고 중계
당분간 데미지 컨트롤 불가피

위기의식은 구조 개혁의 발판
경쟁력 높일 처절한 고민 절실
올해는 바닥 찍고 반등할 元年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오는 20일)을 앞둔 워싱턴은 곧 다가올 ‘퍼펙트 스톰’ 전야인 듯하다. 취임 이후 미국뿐 아니라 세계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 트럼프 2기에 대해 각국 정부와 기업·싱크탱크 등은 정중동으로 손익계산과 대응 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정상적 상황이라면 트럼프의 거래주의적 성향을 역으로 활용해, 한국이 주요 7개국(G7)플러스로 도약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와 BTS, 노벨문학상급 나라에서 갑자기 비상계엄, 탄핵 정국, 최악의 항공기 사고 등이 ‘리얼리티 TV’처럼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G7플러스는 낯선 듯하다. 당분간은 국제무대에서의 데미지 컨트롤과 신뢰 회복에 초점을 둬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당장 트럼프 2기 대비 협상에 우려가 크나, 결국 대미 협상력은 국내에서 나온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통상 협상에서는 이해관계 집단 간 조정 등 대내 협상이 훨씬 어렵고 정치적 자본 소모가 큰 법이다. 트럼프 1기 때 미국의 거친 공세에도 불구하고 딜메이킹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탄핵 직후 출범한 우리 새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70%를 넘어 국내에서 대외 협상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견고한 대외 협상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불확실성과 비정상이 주가 된 정치 리더십의 공백을 빨리 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대외 협상을 서둘러도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쁜 딜을 타결하기보다는 아예 타결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협상의 기본 원칙을 되새겨볼 때다. 물론, 트럼프발 관세 폭탄이 현실화할 경우 협상을 통해 빨리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협상에서 한국이 경쟁국에 비해 몇 개월 늦어진다고 해서 다소 손해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건 아니다. 우리의 기업들은 위기에서의 복원력이 강하며, 정치적 불확실성만 제거되면 뒤처진 대외 협상은 언제든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해에 가지는 희망은, 바닥이 가까이 오면 치고 올라갈 일만 남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위기는 자만심과 나태함을 없애고 그간 하지 못했던 구조적 개혁들을 이룰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올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우리 경제의 근본적 ‘경쟁력 제고’를 위한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 경제를 최대한 객관화해 보면 당장 탄핵 정국으로 인한 경제 불안을 넘어서 더 근본적인 ‘경쟁력’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우리보다 15배가 큰 미국 경제는 한국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인구가 우리의 28배인 이웃 중국은 빅데이터의 축적, 매년 200만 명이 넘는 공과대학 졸업생, 창업 1세대의 헝그리 정신으로 이제는 인공지능(AI)·디지털·제조업에서 우리를 앞서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빨아들이는 2년치 무역흑자가 한국 경제 전체 규모와 맞먹는다. 우리 제조업의 자부심이었던 메모리 위주의 반도체는 AI로 산업 패러다임이 급속히 변화하는 데 적응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제 규모가 우리의 절반도 안 되는 대만은 AI, 반도체 관련 가치사슬이 두텁고 우리보다 더 발전해 있어 증시의 시가총액이 한국을 능가한다. 과연 앞으로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처절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소 냉전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였지만, 미·중 패권 경쟁의 핵심은 기술이다. 유럽연합(EU)도 경쟁력 상실로 존재의 위협을 느끼며, ‘혁신의 차이’가 운명을 갈랐다는 드라기 보고서를 발표했다. 바깥세상에서는 미·중·일·EU 등 경쟁력을 화두로 총력 질주하는데, 국내에서는 이러한 절체절명의 글로벌 전쟁에서 국가 총력의 ‘경쟁력 제고’를 화두로 들어본 지 오래다. 규모가 그들만큼 크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혁신적이거나 유연하거나 민첩해야 한다. 올해는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와 미래를 위해 한국 경제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과감한 ‘리셋’을 하는 원년(元年)이 돼야 한다. ‘좋은 위기(good crisis)를 낭비하지 말라’던 윈스턴 처칠 경의 지혜를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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