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와 카터…빛나는 ‘이후’[뉴스와 시각]

김인구 문화부장

배우 데미 무어가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서브스턴스’로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인상 깊은 소감을 남겼다. 환갑을 넘긴 그는 “약 30년 전에 한 프로듀서가 나를 ‘팝콘 여배우’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믿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나를 갉아먹어 몇 년 전에는 정말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우리가 충분히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성공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결코 충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잣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울먹였다. ‘팝콘 여배우’란 스타로서 흥행은 했지만, 연기로는 인정받지 못한 배우를 깎아내린 표현이다.

중년층 이상에겐 할리우드 톱스타로 각인돼 있는 무어의 소감치곤 매우 뜻밖이다. 최고의 히트작 ‘사랑과 영혼’(1990)을 통해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연기상과는 거리가 멀었다니 미처 몰랐다. 오히려 전신성형설, 연하남 열애설 등 각종 스캔들로 더 유명했던 터라 진심 어린 소감은 매우 큰 울림을 줬다.

지난달 말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새롭게 조명됐다. 39대 대통령(1977∼1981)을 지낸 카터는 재임 시절엔 인기가 없었다. 경기 침체에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도덕적 인권을 앞세운 외교정책도 잘 안 먹혔다. 결국 로널드 레이건에게 뒤지며 재선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퇴임 후에 오히려 빛났다. 카터센터를 바탕으로 평화 증진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에 앞장섰다. 재임 시절보다 더 박수받으며 ‘가장 위대한 미 전직 대통령’으로 불렸고, 중동 평화 노력, 미북 협상 중재 등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둘의 이야기에 주목한 것은 한물갔다고 여겨질 즈음, 다시 목표를 세우고 담대한 도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둘은 주변의 편견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의 주인공이지만, 남모르는 시련을 딛고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뤘다. 굳세고 당당하게 나와 주변을 변화시켰다.

2025년 새해 초다. 새해의 희망과 목표를 가다듬어야 할 시기에 온통 답답하고 우울한 정치 상황뿐이다. 계엄과 탄핵 정국이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연말연시 분위기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연말 특수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연초에 서로 덕담을 나눌 여유조차 없어졌다. 민생과 미래는 곤두박질쳤고, 정치 과잉으로 모두 흥분하고 분노한 상태다. 혐오와 끝장 대결 속에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일상이 무너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우리에겐 카터처럼 ‘이후’가 더 아름다운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대의를 위해 대선 출마를 스스로 포기한 조 바이든 대통령 같은 용기와 결단의 소유자도 없다. ‘가장 위대한’은커녕 ‘평범한’도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무어는 있어 다행이다. 윤여정이 칠순이 넘어 영화 ‘미나리’로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K-무비의 힘을 보여준 바 있다. 이어 황동혁 감독, 한강 작가 등도 눈부셨다. 이제 한국의 진정한 카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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