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풍미·식감 살리는 ‘씨앗’[이우석의 푸드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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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석의 푸드로지 - 부럼

정월대보름날 부럼 깨는 풍습
‘한해 부스럼 나지 않게’ 기원

대표적 ‘저탄고지’ 식품 호두
초콜릿·아이스크림에 어울려

지방많은 땅콩으로 기름도 짜
아프리카에선 식량 대용으로

단백질·칼슘 등 풍부한 아몬드
가루로 마카롱·과자·빵 만들어

곧 정월대보름이다.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날 행하는 여러 세시풍속이 있다. 정초부터(?) 편을 갈라 고싸움과 석전(돌팔매놀이)도 벌이고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등 불장난도 한다. 절식으론 오곡밥과 귀밝이술, 진채(묵은 나물) 등을 먹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부럼’이다. 부럼은 풍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보름날 이로 깨물어 먹는 견과류를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보통 ‘부럼을 깬다’라고 한다. 주로 호두, 땅콩, 잣, 밤 등 견과류를 썼다.

부럼을 하는 명분은 ‘한 해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부럼과 부스럼의 발음이 비슷한 탓에 생겨난 말로 보인다. 부럼은 부스럼을 막는 효과보다는 치아 단련에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동국세시기(1849)’에는 치아 단련을 위해 젊은 남녀들이 새벽에 엿을 먹었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다.

딱딱한 껍데기를 이로 물어 깨면 당장 스트레스도 풀린다. 부럼을 깨는 관습은 현대에도 여느 세시풍속보다 잘 지켜지는 편이다. 설이 지나면 시장이나 할인마트의 좌판에는 다양한 견과류가 깔린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캐슈너트를 넣어 만드는 중국요리 ‘궁보계정(궁바오지딩)’.

견과류(堅果類)는 사실 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글자 그대로 딱딱한(堅) 껍데기 속에 든 열매(果)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름엔 열매라는 뜻이 붙지만 사실은 씨앗이나 그 안에 든 배젖(胚乳)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딱딱한 씨앗 속 발아를 위한 영양분 가득한 덩어리가 배젖이다. 땅콩의 경우는 아예 열매가 아니라 콩 종류인데 딱딱하다고 견과류에 넣는다.

견과류는 곡물류만큼이나 인류가 오랜 시간 상식해 왔을 만큼 중요한 식량이다. 나무에서 열려 수확이 쉽고 각종 영양분이 풍부해 건강에 좋다. 열량도 높고 맛도 좋은 까닭에 비싼 값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요즘과는 달리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옛날엔 열량이 높은 식품이 대대로 대접을 받아왔다.

모두 견과라고 부르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의 견과류는 밤과 도토리, 헤이즐넛(개암나무 열매), 캐슈너트 정도다. 목질화되어 단단한 껍데기가 과육을 보호하는 형태다. 나머지는 커다란 씨앗을 까서 그 안에 든 것을 먹는 것으로 잣, 호두, 피칸, 마카다미아, 아몬드, 브라질너트 등이 해당한다. 간단하게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과쯔(해바라기씨)처럼 씨앗 자체를 까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서양에서도 너트(nut)를 붙여 모두 견과류로 통칭한다.

예나 지금이나 견과류는 그 자체로도 즐겨 먹지만 식품 가공에 많이 들어간다. 수정과 위에 띄우는 잣, 삼계탕에 든 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위에 뿌려진 땅콩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보다 훨씬 많이 쓰인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닙스나 커피를 만드는 원두(coffee bean), 기름과 버터 등 다양한 식품 원료를 만드는 코코넛 역시 견과류에 해당한다. 현대 인류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견과류를 먹고 있는 것인가.

부엌에선 해바라기씨 기름을 쓰고 야구나 축구를 보면서 땅콩을 까먹는다. 전북 정읍에서 쌍화차를 주문하면 잣과 호두가 잔뜩 들었다. 잣은 서양의 기름장(醬) 격인 페스토에도 들어간다. 편의점에서 산 초콜릿 속에는 아몬드가 들었고 비행기 좋은 자리를 타면 간혹 마카다미아를 주기도 한다(그래서 회항할 때도 있다). 아무튼 견과류는 부럼뿐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식재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전북 익산의 디저트 가게 ‘빵곰언니와 호두파이공장’의 대표 메뉴인 호두파이.

대보름날 부럼으로 쓰는 것엔 주로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호두, 뇌를 닮은 껍질이 가장 딱딱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산지는 튀르키예와 이란 쪽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다. 예상했듯이 국내에선 충남 천안시가 대표적 주산지다. 천안 호두과자의 명성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요즘 청설모 등 설치류 탓에 피해를 많이 입고 있다고 한다.

삼국 시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호두는 원래 오랑캐 복숭아란 뜻의 호도(胡桃)라 불렀다. 상관없이 복숭아를 갖다 붙인 것 같지만 사실 호두 열매는 덜 익은 자두처럼 생겼다. 개오동나무(楸子) 열매와 닮았대서 당추자(唐楸子)라고도 불렀다.

과피와 과육을 버리고 그 안에 든 커다란 씨앗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호두다. 딱딱한 씨앗 껍데기도 쭈글쭈글한데 속에도 마치 뇌처럼 생긴 배젖 한 쌍이 들었다. 사람은 그것을 먹는다. 동서고금 인기 있는 견과류다 보니 딱딱한 껍데기를 까는 방법도 발달했다. 중세 중유럽 지방에는 전문적으로 껍데기를 깨뜨려 주는 인형도 고안했다.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이 바로 그것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땅콩으로 고소한 맛을 더한 ‘멘야하나비’의 마제소바.

그냥도 먹지만 호두는 여러 음식에 쓴다. 우리나라에선 반찬이나 한과에 쓰고 미국에선 호두파이를 만들어 먹는다. 대부분의 견과가 그렇듯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 등 달곰한 음식에 잘 어울린다. 잘게 빻아서 아이스크림에 토핑하거나 섞어 먹는 용도로 쓴다. 호두는 탄수화물보다 단백질과 지방이 많은 이른바 ‘저탄고지’ 식품이다. 여기다 다양한 무기질과 미네랄을 함유해 건강에 좋다. 열량은 꽤 높은 편으로 생존을 위한 비상식량이나 군인들의 전투식량에도 들어간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콩과에 속하지만 딱딱하다는 이유 하나로 생활 속에서 견과류로 분류되는 것이 땅콩이다. 그나마 저렴해 부럼으로 즐겨 쓴다. 감자, 옥수수, 토마토, 초콜릿 등 세상에 많은 음식이 신대륙에서 왔듯이 땅콩 또한 남미(안데스 동부)가 원산지이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다면 지금 세계인의 식탁은 무척 옹색했을 것이다.

조선 정조 때 들어왔는데 땅속에서 자란다고 땅콩, 호콩이라 불렀다. 한자로는 낙화생(落花生), 또는 화생(花生)이라 쓴다. 우리도 썼다. 가끔 옛날 소설에 낙화생이란 말이 등장한다. 말은 견과인데 그리 딱딱한 껍데기는 없다. 오히려 푸석한 꼬투리 안에 들었다. 겉이나 속껍질을 까기도 쉽다. 그냥 깨물어 먹으면 된다. 콩보다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소금을 뿌려 볶아내면 그대로 과자처럼 즐길 수 있다. 지방이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단백질 함유량 또한 높다.

땅콩의 높은 지방 함유량에 주목해 기름, 버터, 마가린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든다. 심지어 나이트로글리세린(다이너마이트의 원료) 제조에도 쓰였다. 특유의 알레르기 반응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땅콩기름은 고급 식재료로 쓰인다. 미국의 유명한 햄버거 체인 파이브가이즈(국내에도 진출했다)는 식품 조리에 땅콩기름을 쓰는 것은 물론, 간식으로 무료 땅콩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주 우도의 명물 땅콩으로 만든 땅콩아이스크림.

중국인은 땅콩을 식생활에 잘 활용한다. 옥수수와 함께 들여왔더니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구황식품 노릇을 했다. 기본 반찬으로 내고 조리에도 다양하게 쓰고 있다. 쓰촨(四川)식 요리인 궁바오지딩(宮保鷄丁)은 닭고기와 땅콩, 채소를 볶아낸 요리다. 세계적으로 중국이 생산 및 소비량 1위를 수성하고 있고 아프리카에서도 식량 대용으로 많이 쓴다. 국내에선 제주도 우도 땅콩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땅콩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얼마 전 타계한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다. 해군 전역 후 고향(조지아주)에서 땅콩 농사를 짓다가 정치에 입문, 제39대 대통령이 됐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로 장수했다. 향년 100세로 별세했으니 땅콩이 몸에 좋다는 얘기도 자연스레 나온다.

땅콩은 ‘심심풀이’로 많이 즐기는 식품이다. 스포츠 경기나 TV 등을 시청하거나 장거리 열차 탑승 시 땅콩을 먹는 클리셰가 등장한다. 맥주와 잘 어울리는 안줏거리로도 인기가 많다. 그래서 국내에선 일찌감치 오징어땅콩 과자도 등장해 지금껏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75년 출시했으니 무려 50년이다.

대표적 견과류에는 아몬드가 빠질 수 없다. 복사꽃처럼 생긴 꽃이 지고 맺히는 열매가 납작한 복숭아처럼 생겼대서 붙은 이름 편도(扁桃)의 씨앗이 아몬드다. 원산지는 인도 북부이며 일찍 유럽에 전래됐다. 호두처럼 얇은 과피와 과육이 있는데 이는 먹을 수 없고 고소한 씨앗을 먹는다.

아몬드는 1980년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며 미국산 ‘블루 다이아몬드’로 잘 알려졌다(다이아몬드에 아몬드란 말이 숨어 있다). 미국산이 전 세계 아몬드 생산량의 80%에 육박할 정도로 독점적이다. 초콜릿에 박혀 있는 아몬드가 가장 익숙하지만, 마카롱을 아몬드 가루로 만든다는 것엔 생소하다는 이들이 많다. 바삭한 식감의 아몬드 가루는 과자나 빵을 만들 때 범용적으로 쓰이는 식재료다.

아몬드는 밀가루에 비하면 글루텐이 거의 없어 글루텐 프리 제과에 사용되며 맛과 식감 때문에 그냥도 즐겨 쓴다. 항산화물질 폴리페놀, 불포화지방산, 단백질, 칼슘, 비타민E, 망간, 마그네슘에다 식이섬유(dietary fiber)까지 풍부해 완전식품으로 꼽힌다. 또 뇌 건강에 좋다는 리보플래빈 성분이 들어 ‘뇌를 닮은(?)’ 호두와 함께 머리가 좋아지는 식품으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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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몬드 밀크까지 국내에 소개되며 비건들의 인기 아이템으로 유통되고 있다. 믹스너트로 불리는 복합 견과 제품에는 아몬드가 빠지지 않는데 호두나 피스타치오 등에 비해 떫거나 쓴맛이 없고 고소한 맛이 더하기 때문이다.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은 ‘심심풀이’ 견과류는 무료한 일상에 스트레스를 날리고 즐거움을 주는 고마운 음식이다. 정월대보름의 부럼이 진짜로 부스럼까지 가져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마제소바 =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명물 ‘마제소바’의 원조는 멘야하나비다. 한국에도 진출했다. 고기 고명에 쪽파 등 채소를 잘게 썰어 넣은 되직한 소스에 굵은 우동 면을 비벼 먹는 방식이다. 마치 자장면 같은 느낌. 다양한 재료를 쓴 소스에서 고소한 맛을 책임지는 것은 바로 땅콩. 매콤한 양념에 고소함을 더해 면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먹기 전에 식탁에 비치된 다시마 식초를 한 번 둘러 먹으면 풍미와 식감이 한결 좋아진다. 서울 송파구 백제고분로45길 38.

◇호두파이 = 곰 얼굴 모양의 귀여운 호두파이와 다양한 종류의 타르트를 만들어 파는 ‘빵곰언니와 호두파이 공장’은 전국적으로 젊은층에 널리 알려진 디저트 집이다. 매일 직접 구워내는 타르트와 함께 시그니처 메뉴인 호두파이가 인기다. 살짝 달콤한 파이 위에 빼곡하게 박힌 고소한 호두 알갱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호두 타르트도 있다. 익산 시내 구도심에 있는 집인데 SNS 등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 순례객을 양산하고 있다. 전북 익산시 고봉로24길 25.

◇땅콩아이스크림 = 담백하고 고소한 견과류는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 파이 등 달곰한 맛과 꽤 어울린다. 제주도의 땅콩 명산지 우도에는 땅콩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많다. 하고수동 해변 앞 카페 우도몬딱은 탁 트인 전망과 함께 달콤하고 고소한 땅콩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부드럽고 진한 우유아이스크림 속에 땅콩 특유의 맛이 서려 있다. 국내 최고 바다 빛을 자랑하는 해변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까지 섞이면 훨씬 맛이 살아난다. 제주 제주시 우도면 우도해안길 794.

◇탄탄면 = 일본식 ‘탄탄멘’을 전문적으로 파는 탄탄면공방은 중국 쓰촨(四川)성 명물 단단？(擔擔麵)과는 조금 다르다. 쓰촨 요리 특유의 얼얼한 마라 양념에 땅콩기름을 넣어 순화시켰다. 돼지고기를 넣고 볶아낸 육수에 면을 말아낸다. 화끈한 마라 양념이지만 땅콩기름이 들어가면서 한결 부드러워진다. 국 요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말아먹을 수 있도록 무료로 밥을 내준다. 서울 중구 명동7길 21.

◇막국수 = 양양 하면 바다를 질주하는 서퍼들의 성지로 꼽히지만 의외로 막국수를 잘하는 집이 내륙에 있다. 범부메밀국수는 해바라기씨와 호박씨 등 견과류와 김가루를 수북이 얹어주는 메밀막국숫집이다. 매콤한 양념에 쓱싹 비벼 두꺼운 면발을 씹노라면 구수한 메밀향을 즐길 수 있는데 이때 섞여 들어간 견과류가 고소한 맛을 거든다. 비빔국수를 먹다 차가운 육수를 부으면 두 가지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강원 양양군 서면 고인돌길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