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4) 왕의 인성과 사생활 : 태조 (上)
생모 일찍 죽고 친누나 출가
배다른 형·동생 사이 꼈지만
친자식처럼 아낀 서모 덕에
갈등없이 우애깊은 유년시절
서모, 시기하는 이 생길까봐
“능력 드러내지 말라” 가르쳐
“누구의 위에 서려 하지 않아”
이정형 ‘동각잡기’에 기록도
# 이복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보낸 어린 시절
태조 이성계는 1335년 음력 10월 11일에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자춘은 함흥의 유력한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영흥의 유력한 가문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함경도 지역의 유력한 두 가문을 배경으로 둔 셈이었다. 말하자면 함경도 유지의 옥동자로 태어난 셈이었다. 하지만 함경도는 변방이라 비록 그곳에서는 이름난 가문이라고 해도 고려 귀족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위로 누나 한 명과 형 한 명이 있었다. 누나(정화공주)는 이성계의 생모 최 씨에게서 태어난 동복누나였지만, 5세 위의 원계는 배다른 형이었다.
이복형 원계의 어머니는 이 씨로 이름은 내은장이었다. 실록은 원계의 어머니 이 씨를 이자춘의 여종 출신 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원계는 이자춘이 16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내은장은 이자춘이 적어도 15세 이전에 맞아들인 아내인 셈이다. 15세는 그 시절에 이제 막 혼인을 할 나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첩을 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원계의 어머니 내은장은 이자춘의 첩이 아니라 첫 부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사실, 실록엔 내은장이 첩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388년에 이색이 쓴 이자춘의 묘비문에는 정식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원계도 서자가 아니라 장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내은장을 첩으로 기록한 것은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 이후였다.
어쨌든 이성계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자춘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던 셈이다. 그때 이자춘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리고 이자춘은 4년쯤 뒤에 또 한 명의 부인을 얻었다. 그녀는 김 씨 성을 쓰는 고음가라는 여인으로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이화의 생모였다. 이화는 이성계보다 5세 어렸다. 이는 고음가가 이성계가 태어난 뒤에 이자춘이 취한 여인이란 뜻이다. 이자춘의 묘비문에는 그가 ‘삼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세 명의 아내를 뒀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원계의 생모 내은장과 성계의 생모 최 씨, 화의 생모 고음가 모두 정식 부인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원나라 지배기의 고려에서는 중처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정식 부인을 여럿 둘 수 있는 제도였다. 이성계가 신의왕후 한 씨와 신덕왕후 강 씨를 모두 정식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도 중처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자춘이 세 명의 아내를 맞이했음을 의미하는 ‘삼취했다’라는 표현은 당시로선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듯 이성계는 유년 시절에 세 명의 어머니 아래서 두 명의 이복형제와 함께 자랐다. 다섯 살 많은 이복형과 다섯 살 어린 이복동생 사이에 낀 채로 유소년기를 보냈다는 뜻이다. 하지만 원계의 생모 내은장은 오래 생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성계와 관련된 일화에서 이화의 생모 김 씨는 등장하지만 내은장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계의 생모 최 씨가 이성계의 성장 과정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녀도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린 이성계는 이화의 생모인 서모 김 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 배려심 많은 서모, 재주를 숨길 줄 아는 아이
이성계는 서모 김 씨와 두 명의 이복형제와도 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실록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처음에 환조(이자춘)가 세상을 떠나시니, 태조가 정안옹주 김 씨를 맞이하여 서울의 집으로 와서 그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고, 매양 나아가 뵈올 적엔 항상 섬돌 아래에 꿇어앉았다. 공민왕이 태조를 존경하는 까닭에, 김 씨의 아들 이화를 사랑하여 우대해 항상 금중(禁中)에 두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이화에게 음식물을 내려 어머니에게 드리게 하고, 또 교방(기생 학교)에서 음악을 내려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였다. 태조도 임금의 내려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가무를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또 화와 서형 이원계와 더불어 항상 같이 거처하며 우애가 더욱 지극하여 그 어머니의 천안(賤案·노비 문서)을 모두 불살라 없애 버렸다.’
생모가 일찍 죽고, 자신의 집 노비 출신인 서모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가련한 소년, 그가 바로 어린 시절의 이성계였다. 아무리 귀한 집안의 자식이라고 해도 엄마 없는 아이는 모두 불쌍한 법이다. 비록 친누나가 있긴 했지만, 그녀는 미처 성인도 되기 전인 15세쯤 조인벽에게 출가했고, 형과 동생은 모두 배다른 형제인 상황. 이런 처지로 본다면 이성계의 어린 시절은 쓸쓸함과 외로움을 넘어 구박덩이 신세였을 법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서모 김 씨가 생모의 빈자리를 잘 채워줬다. 그녀는 이성계를 친자식처럼 아꼈던 모양이다. ‘용비어천가’와 ‘태조실록’ 총서의 다음 기록은 이성계에 대한 서모 김 씨의 마음을 잘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태조가 소싯적에 정안옹주 김 씨가 담 머리에 앉아 있는 다섯 마리의 갈까마귀를 보고 쏘기를 청하니, 태조가 한 번 쏘아서 다섯 마리의 머리를 다 떨어뜨렸다. 김 씨가 신기하게 여기며 ‘이 일은 아예 누설하지 말라’ 하였다.’
이성계의 궁술 솜씨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모양인데, 서모 김 씨는 이성계의 그 뛰어난 능력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도록 했다. 뛰어남이 지나치면 시기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서모 김 씨는 혹 이성계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봐 함부로 실력을 드러내지 말라고 조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 아끼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함부로 재주를 드러내지 말라는 서모 김 씨의 가르침은 이성계의 행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의 다음 글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태조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하였으며, 누군가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하는 것과 그의 맞히는 수효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상대편과 비슷하게 할 뿐이었고, 결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었다. 권하는 이가 있어도 또한 한 번쯤 더 맞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성계가 이렇듯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함부로 드러내지 않은 것과 서모 김 씨의 가르침은 맥을 같이한다. 이는 이성계가 서모 김 씨의 가르침을 자신의 행동 방식의 중요한 잣대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서모였지만, 김 씨는 이성계를 친자식처럼 아꼈고 이성계 또한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잘 따랐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이성계는 엄마 잃은 다른 아이들처럼 외롭고 쓸쓸한 구박덩이로 자라지 않고 오히려 재주가 남다른 영특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작가
■ 용어설명 -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시대 문신 이정형(李廷馨·1549∼1607)이 고려 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배경으로부터 선조 때까지 정치와 명신(名臣)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이라고도 하며 상·하 두 권으로 구성돼 있다. 상권은 조선의 건국 배경으로부터 중종 연간의 기묘사화까지, 하권은 중종 말년의 정치적 사건으로부터 선조 때의 임진왜란까지 기록했다. 야사의 저술에 뜻을 두고 기록하였으므로 국가의 정치와 명신의 행적 이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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