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녀는 어떻게 춤을 췄을까… 초상화에 반해 탄생한 곡[이 남자의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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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남자의 클래식 -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루브르에서 접한 ‘마르가리타’
인상주의 천재의 상상력 자극

그림에서 전해진 연민과 동경
우아하며 고결한 춤곡으로 탄생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프랑스 음악의 향기를 대변함과 동시에 근대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인상주의 음악이란 표제 음악과 같이 어떤 감정이나 서사를 묘사하기보다는, 암시와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 음악을 뜻한다. 7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라벨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겨우 14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음악원에서 피아노·대위법·작곡 등을 공부한 라벨은 서서히 자신만의 강한 개성과 독창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다.

1899년 라벨은 루브르에서 한 어린 소녀의 초상화에 푹 빠져있었다. 바로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 ‘마르가리타 테레사’였다.

마르가리타는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공주로 고작 22세에 세상을 등진 비운의 여인이다.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같은 합스부르크가의 인물과 정략결혼이 맺어져 있었다. 라벨이 루브르에서 보았던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화는 아마도 정략결혼 상대를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당신의 미래의 신부가 이렇게 건강히 잘 자라고 있소’하는 일종의 프로필 사진처럼 말이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로마의 황제 레오폴트 1세로 그녀에겐 외삼촌뻘이었다. 13세가 되던 해에 마르가리타는 약혼을 맺었고 15세에 결혼해 고향 땅인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에 정주하게 된다. 외삼촌뻘이긴 했지만 레오폴트 1세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둘은 모두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고 부부 금실도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른 나이부터의 연이은 출산이 이유였을까. 고작 22세의 나이로 마르가리타는 네 번째 자식을 사생아로 남긴 채 타국에서 가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라벨이 루브르에 걸린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의 초상화에 매료되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라벨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의 경계에 위치한 프랑스령의 바스크 지방 시부르에서 태어났다. 라벨의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의 기계공이었지만 어머니는 스페인의 정취가 가득한 바스크에서 나고 자란 여인으로 라벨에겐 스페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라벨은 자신보다 200년 전에 살다간 마르가리타를 알진 못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여인으로서의 동경과 흠모를 느꼈고 동시에 연민의 감정과 더불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던 것이다. 라벨은 초상화에서 한 여인으로부터 전해지는 고결함과 우아함 그리고 슬픔의 감정을 음악으로 그려낼 것을 결심했고 그렇게 작곡된 곡이 바로 ‘죽은 왕녀(마르가리타)를 위한 파반’인 것이다. 파반이란 공작새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파보(Pavo)에 어원을 둔 음악용어로 16∼17세기에 성행한 춤곡을 일컫는다. 라벨에게 파반이란 음악의 그릇은 마르가리타를 담아낼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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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도도하게 걷는 공작새를 연상케 하는 파반은 궁정의 위엄은 물론 고결함과 우아함을 모두 품고 있는 춤곡이었으니 말이다.

라벨은 이 곡에 대해 ‘옛 스페인의 궁전에서 작고 어린 왕녀가 춤을 췄을 것 같은 파반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 오늘의 추천곡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1899년 라벨이 24세 되던 해에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초기작품으로 초연은 3년 뒤인 1902년 4월 5일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전적인 론도형식에 라벨 특유의 화성이 더해져 우아하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라벨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910년엔 관현악 버전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관현악 편곡 버전이 보다 널리 연주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