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이 아닌 지금을 위해… 보고듣고 결국엔 ‘쓰는 삶’[시인의 서재]

■ 시인의 서재

‘문구’라면 일단 두 손부터 들고 보는 저인지라, ‘뮤지엄’이라면 덜컥 두 무릎부터 꿇고 보는 저인 터라 ‘THE STATIONERY MUSEUM’이라는 제목이 표지 3분의 1을 장식한 352쪽짜리 책 한 권을 후딱 주문하고 보았습니다. 판형은 컸습니다. 종이는 묵직했습니다. 이미지는 정직했습니다. 만년필과 연필을 비롯한 각종 필기구, 노트, 기발한 아이디어를 장착한 온갖 문구까지 81가지 제품과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가 깊이 있는 상냥함으로 가독성 있게 펼쳐지는바,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억은 뒤로 걷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 추억이라는 체에서 건져 올려진 ‘내가’ 나의 취향이니 말입니다. 하여 나의 취향껏 모아두었던 문구를 책상 위에 우르르 쏟고 일일이 확인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내가 몰랐던 새 브랜드를 검색하고 신제품을 사들이느라 빈번한 카드 결제를 자랑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서랍 가득 빼곡하게 들어찬 필기구를 마주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목수는 몰라도, 작가는 연장 탓하면 안 되겠죠?” 하는 작가의 말에 쓰레기봉투를 꺼내오는 실행을 서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문구는 벗이자 생존 도구였다”는 작가의 프로필에 얼씨구나 신이 나서 재빨리 쓰레기봉투를 접어버린 것이 또한 오늘의 제가 맞을 것입니다. 그렇게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쓴다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 건 목차에서 만난 이 한 줄 덕분이었습니다.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라는 파이롯트 프릭션 펜을 소개하는 의미심장한 한 문장. 순간 ‘쓰기’가 곧 ‘살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 뒤에 그 어떤 쓰기란 없고, 그 어떤 살이 앞에 죽음 역시 놓일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문구라는 친구, 평생에 그 하나를 찾기 위한 오늘의 무수한 소비는 아름다운 헤맴이라는 것!

“기억과 기록은 종이 한 장 차이죠.” 오십이 되고 보니 20년 전 일은 생생한데 21년 전 일은 가물가물합니다. 기억할 수 없다면 기록해야 한다는 걸 이즈음의 시국을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정직한 메모는 정확한 증거가 되기도 하거니와 요인즉슨 기록하기 위해서는 문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나중에 기억하기 위해 적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기억하기 위해 적는다.” 미국의 노트 브랜드 ‘필드 노트’의 슬로건이 유독 나를 잡아끄는 이유를 능히 짐작하는 데서 특히나 잘 찢어지지 않고 방수 기능까지 있다는 ‘익스페디션’ 노트와 작업용 연필을 구입하고 나니 통장을 ‘텅장’ 하고 발음하게도 됩니다. 이상, 올해도 ‘의로운 소비’라는 말을 섬길 것 같다는 한 맥시멀리스트의 고백이었습니다.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