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판결 무시한 공동체, 처참히 멸망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43) 군주와 국법

■ 플라톤 ‘크리톤’

사형선고 소크라테스
부당 판결 억울했지만
“개인이 법 무시하면
나라 존립 하겠나?”

합의한 법률대로 사는
법치주의 일깨워줘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친구 크리톤은 탈옥을 제안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 나라에서 법정의 판결들이 개인들에 의해 무력하게 되고, 효력을 상실하고 파기된다면, 이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 계속 존립할 수 있겠는가?”(플라톤의 ‘크리톤’) 그는 관습과 상식을 문제 삼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옳고, 좋고, 아름다운 삶인지 물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며, 다수의 판단과 전통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보편타당한 삶과 행동의 원리를 찾으려 했다. 그것이 죄란 말인가? 어쩌면 그는 몹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일생에 걸친 그의 문제 제기는 당대의 엘리트는 물론 일반 대중까지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맹신하던 것들을 깊숙이 파고들어 근본부터 건드렸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는 고발당했고 법정에 서야만 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경배하는 신들을 부정하여 기존 가치 체계를 송두리째 흔들면서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라는 것이 죄목이었다. 그는 변론했다.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소. 나는 단지 인간이 덕을 실천하며 살아갈 길을 탐구했을 뿐이오.” 그는 진지하게 변명했지만,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네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네. 모든 것이 부당하네. 여기서 빨리 나가세. 내가 모든 조처를 해 놓았네.” 크리톤은 간수를 매수하고 망명을 준비해 놓았다. 그는 그것이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행동이며 친구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고발과 재판은 부당했고, 판정관들은 어리석었으며, 결과는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제안을 딱 잘랐다. “이보게 친구. 법률과 국가 공동체가 여기서 탈출하려는 우리에게 다가와 말한다고 가정해 보세.”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 후, 집행이 유예된 한 달 가까이 깊은 숙고에 들어갔고, 법을 하나의 인격체로 두고 진지한 대화를 진행했던 모양이다. 법은 국가의 모든 소속원이 꼭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정치적 권력을 얻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어떤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보다는 합의한 법률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완벽한 법이 있겠는가? 여러 사람의 다양한 욕망을 조율하다 보면 법은 복잡 미묘해지고, 인간이 만드는 까닭에 어딘가에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억울하게 원하지 않는 제약과 형벌을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상식에 따라 행동했는데도 뜻하지 않게 법률에 저촉될 수도 있다. 법을 자세하게 모를 수도 있고, 어떤 상식과는 충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법을 무시하고 법의 판결에 불복한다면, 법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법은 공적인 힘을 잃을 것이다. 법을 기반으로 약속한 공동체의 구성은 흔들리고 균열을 일으키며, 마침내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법 위에 서서, 법을 제멋대로 적용하고 입맛대로 개정할 수 있는 강한 자가 자기 욕망에 따라 독선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그에 저항하는 국민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자기 권력을 다져나가는 독재적 정치가 자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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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불법을 자행해 놓고, 그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고, 교묘한 궤변으로 핵심 논점을 흐리면서 사안을 왜곡하며, 법의 빈틈을 교묘히 이용하여 처벌을 면하려고 한다면, 더욱더 심각하게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공동체는 분열되고 양극으로 갈라져 싸움을 벌이고, 내부의 분열은 곧 외부의 표적이 되고 말 것이다. 우방이라면 안정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신탁통치를 노릴 것이며, 적국이라면 그 공동체의 혼란을 틈타 정복의 야욕을 드러낼 것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법과 판결을 무시하는 공동체는 처참하게 망할 것이다.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고 법치주의를 회복할 것인가, 아니면 법을 무시하고 망하는 길로 갈 것인가, 그 옛날 소크라테스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