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공공병원 경험한 문화인류학자… “의료, 인간에 필요한 모든 ‘돌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백동현 기자

■ ‘돌봄이…’ 펴낸 서보경 교수

지역모금으로 성장한 종합병원
주민·의료진 책임이 이끈 성과

“한국의 모든 산업 발전이 그렇지만 의료 부분에서도 기초를 다질 시간이 없었어요. 그리고 의료가 전문화되고 세분화하는 이 시기에 우리가 ‘의료대란’이라고 부르는 사태가 일어난 거죠.”

K-의료라는 명성을 뒤로하고 어느덧 응급실 뺑뺑이를 비롯한 의료 대란이 일상이 된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 그 앞에서 의료인류학자인 서보경(사진)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정부의 비민주성’과 ‘집단주의’의 충돌과 같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의료란 “사람살이의 한 방법”. 즉, 단순히 병원 안에서 이뤄지는 기술적인 치료나 공공의 의무를 넘어서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돌봄인 만큼 그 체계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만 작동하는 것이다. 최근 문화일보에서 만난 서 교수는 “한국은 주치의 제도도 실험해 보지 못했고 1차 의료에 대한 제대로 된 경험도 없이 의료 제공자와 이용자 모두 너무 빠른 수준 변화를 겪었다”며 “그 와중에 지역 사회가 붕괴하고 인구는 고령화되면서 의료 자체가 어려운 시점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모든 사람이 필수적인 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의료의 이상적인 목표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던 서 교수는 지난 2010년 태국으로 향했고 그 현장에서의 연구를 ‘돌봄이 이끄는 자리’(반비)에 담아냈다. 경제적으로 심각한 불평등을 경험한 나라 중 하나인 이곳은 놀랍게도 2009년 보편적 건강보장을 위해 건강보험 개혁을 선제적으로 실행했고 국민의 98%가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다. 공공병원의 활성화로 환자라면 누구나 무상에 가까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고 그 대상엔 채권자나 시민권이 없는 이주민까지 포함돼 있다.

제도적 기반만을 고려했을 땐 ‘보건의료계의 유토피아’일 것만 같은 이곳에도 문제는 존재했다. 서 교수는 “태국처럼 공공병원이 발전된 곳에서도 민간 병원으로의 의료진 유출을 비롯해 의료 서비스 격차, 그리고 공공 의료에 기대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는 사회적 박탈감까지 다양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의료 체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할 수 없고 또 단순히 병원 안에서만 머물지도 않는다. 치료는 물론 고령자나 기저질환자에 대한 돌봄까지 포괄할 정도로 의료는 그 층위가 깊고 범위가 넓다.

여기서 의료가 이상적인 형태로 나아가기 위해 서 교수가 제안하는 개념은 ‘이끌어 내기’다. 태국의 반팻 병원을 예시로 든 그는 “연구를 위해 찾았던 병원이 지역 주민들의 모금과 의사들의 도움으로 어느덧 180병상 규모의 종합 병원으로 성장했다”며 “지역민들이 우리 지역에 병원이 있어야만 아프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고 의료진 또한 돌봄의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며 나온 성과”라고 전했다. 사람과 병원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관계가 서로를 ‘이끌어 낸’ 결과로, 지역 의료가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다시 한국의 의료 환경으로 돌아와 보자.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병원에 별점을 매기는 사회이자 공공의 몫을 민간 병원에 맡기는 고유한 의료 형태를 가진 이 나라에서도 서 교수의 ‘이끌어 내기’는 적용이 가능하다. 다만 “의료는 국가마다 고유한 형태로 발전한 만큼” 한국의 제도에도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서 교수는 “태국이 한정적인 자원을 갖고도 이주민까지 포괄한 모든 국민에게 제공했다는 점이 참고할 만하다”고 했다. “산업과 기술이 발전한 한국에서도 이제는 공공 의료란 무엇인지, 공공의 영역은 어디까지인지를 고민할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