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남성’ 바라는 사회[뉴스와 시각]

박동미 문화부 차장

유니콘 같은 남자 ‘유은호’를 탄생시킨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가 얼마 전 종영했다. 많은 사람의 알고리즘이 여전히 그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것이다. 육아도 살림도 회사 일도, 그리고 (심지어) 연애까지 야무진 남주(남자 주인공)는 이제까지 없었으니까. 그리고 알고리즘 바깥엔, 다시 말해 현실엔 유은호가 없으니까…. ‘나의 완벽한 비서’는 로맨스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여성 CEO와 남성 비서라는 ‘관계의 역전’, 남성을 돌봄의 주체로 내세운 ‘역할의 전복’ 등을 보여주며 흥행에 성공했다. 즉, 아는 맛과 모르는 맛의 ‘완벽한’ 배합. 그게 아니면, 아무리 ‘완벽한’ 유은호라도 이렇게까지 우리의 마음을 흔들 순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은호 같은 비서’를 갈망하는 동안, 옆 나라 일본에서도 아는 맛과 모르는 맛을 잘 섞은 SF 드라마가 인기였다. 지난 1월부터 닛테레(일본 텔레비전)에서 방영 중인 ‘핫 스팟(Hot spot)’. 주인공은 유은호와는 (특히 외양적으로) 많이 다른, 50대 중반의 남성 다카하시다. 어디서 본 듯한 흔한 외모의 중년 남성(아는 맛)이 사실 외계인(모르는 맛)이라는 설정인데, 외계인으로서의 능력을 활용해 주변 여성들의 온갖 민원을 처리해준다는 점에선, 그도 ‘비서’나 다름없다. 후지산 인근 작은 호텔에서 일하는 다카하시는 ET의 형상도 아니고,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K-외계인의 대표 아닌가)은 더욱 아니다. 드라마 포스터엔 후지산에 불시착한 듯한 거대한 우주선이 그려져 있지만, 그에 걸맞은 스펙터클은 한 장면도 없다. 대신, 다카하시의 능력은 이런 것들. 체육관 천장에 끼인 배구공 빼 오기, 호텔 투숙객이 두고 간 수험표 갖다주기, 차에 치일 뻔한 직장 동료 구하기, 스마트폰 보호필름 반듯하게 붙이기…. 이쯤 되면 ‘짠내’나는 히어로물이다. 아, 능력 하나 더 추가. 다카하시는 중년 남성치고 젊은 여성들과 제법 소통한다. 30∼40대 ‘조시카이(女子會·여성 모임)’에 곧잘 끼여 잘 먹고 잘 떠든다. 그러다이것저것 귀찮은 일을 잔뜩 떠안지만.

‘나의 완벽한 비서’에 열광하다가 ‘핫 스팟’에 피식피식 웃다가, 전혀 ‘다르게’ 생긴 남주가 나오는, 전혀 다른 장르의 두 드라마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판타지를 걷어내면 보이는 두 작품의 본질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점. 유은호와 다카하시에겐 ‘무해함’이라는 시대의 유행어가 관통한다. 유은호는 로맨스 드라마의 대세였던 까칠하고, 때로 거친 ‘나쁜 남자’와 달리, 배려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다정함으로 승부한다. 다카하시는 직장 상사나 아버지 등 일본 드라마에서 주로 위압적으로 자리했던 중년남이 아니라, 자신보다 젊은 여성들과도 수평적 대화가 가능한 동료로서 존재한다.

결국 두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한 진짜 힘은 유은호의 준수한 외모도, 다카하시의 초능력도 아닌, 두 사람이 드러내는 무해함, 다정함, 소통력이다. 또한, 높은 시청률과 호평을 생각하면, 그들이 시대가 바라고, 또 요구하는 남성상에 가깝다는 뜻도 되겠다. 이 시대 여성과 평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남성은 누구인가, 나아가 공감과 연대가 가능한 인류란 어떤 모습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남자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은 시대를 거스르는 ‘유해한’ 변명이다. 유은호와 다카하시가 열어젖힌 새로운 남주의 시대가 기대된다. 더욱 다채롭고 ‘무해한’ 남주들이 오고 있다. 더불어 판타지 남주가 현실이 되는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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