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불신 키운 ‘원님 재판’[뉴스와 시각]

김남석 사회부 차장

‘남북 분단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법적 논리로는 미처 다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공백’이 도처에 산재해 있음.’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허경무)가 문재인 정부 당시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의 주역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서훈 전 국가정보원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 대해 기소 2년 만에 내놓은 1심 선고에서 각각 징역 10개월, 6개월 선고를 유예하며 밝힌 양형 사유다. 선고유예는 2년간 형의 선고를 유예하는 것으로 유예기간이 끝나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전과기록도 남지 않는다. 정 전 실장 등은 2019년 11월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어민 2명을 5일 만에 북송했고 이들은 며칠 뒤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 최대 쟁점은 탈북어민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판단하느냐였다. 재판부는 “국적법 제2조에 따라 이들이 출생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 지위를 취득했다”면서도 “사회적 공론화·토론으로 모순과 공백을 메우는 대신 피고인들을 처벌하는 게 나은 해결책인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판결의 또 다른 논쟁거리는 선고유예 요건이었다. 형법 제59조는 ‘1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자격정지 또는 벌금의 형을 선고할 경우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때 선고를 유예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2003년 대법원 판례상 꼭 죄를 깊이 뉘우쳐야 선고유예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반성 정도가 중요 요건인 셈이다. 하지만 정 전 실장 등은 선고 직후 “재판부가 밝힌 내용이 사실은 피고인들이 무죄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2023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1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은 비율은 0.78%였다. 약 130명 중 1명만이 받는 가장 가벼운 처분을 내린 것인데 재판부 스스로 우리 국민으로 규정한 탈북어민들을 본인 의사에 반해 강제북송한 행위가 과연 죄질이 경미한 사안인지 의문이다. 남북 분단이 계속되고 탈북어민 북송과 같거나 유사한 사건이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재판부의 솜방망이 처벌은 동일한 위법행위가 반복될 수 있도록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평가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은 법관의 양심이 개인적 소신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의해’ 뒷받침되는 직업적 양심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관이 헌법과 법률보다 양심이나 재량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 소신을 앞세우면 민주주의 기반인 법치주의는 흔들릴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정치 사법화로 사법 불신이 심화하고 사법부 독립마저 위협받는 상황이다. 법원 난입 사태가 발생하고 특정 법관의 신상을 털거나 인신공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기본권을 보호하고 법의 정의를 구현하는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에 대한 공격은 용납할 수 없지만, 법원도 이를 자초했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법리’가 아니라 ‘법리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공백’을 내세워 국민의 생명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반성 없는 고위공직자를 솜방망이 처벌하는 판결은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에 의심을 갖게 하는 주범이다. 오직 법리에 따라 재판하는 법관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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