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이냐 ‘버터’냐… 안보강화 - 복지유지 딜레마 빠진 유럽[Global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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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lobal Focus - 트럼프發 ‘국방비 증액’ 압박 받는 EU

우크라전쟁 이후 위기감 확산 속
트럼프, 방위비 5% 확대 으름장
유럽 국가들 ‘자강론’에 불 지펴
복지예산 털어 국방비 인상 모색

의료·연금 등 복지 확대 집중에
유럽국방비는 30년째 답보상태
GDP의 2% 이상 24개국에 그쳐
고령인구 많을수록 반발 거셀듯

‘총이냐 버터냐.’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이어진 평화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복지 제도를 구축해온 유럽 사회가 위기를 맞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대륙에 안보 불안이 커지면서 버터(복지예산)를 총(국방비)과 맞바꿔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는 공짜 안보를 줄 수 없다”며 막대한 국방비 증액을 압박하고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에 유럽 대륙은 총을 선택할 것이냐, 버터를 선택할 것이냐를 놓고 기로에 서게 됐다.

◇유럽연합(EU), 복지 예산까지 털어 국방비 ‘영끌’=유럽 내에서 국방비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30년 전부터 제기돼왔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지난 1994년 회원국들에 국방비 예산을 10년 안에 국내총생산(GDP)의 2%로 올리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 지출 증가 등으로 유럽 각국의 국방비는 30년간 답보상태였다. 현재까지도 32개 나토 회원국 중에서 GDP의 2% 이상 국방비를 쓰는 나라는 24개국에 그친다. 독일의 국방비는 지난해 처음으로 GDP의 2%를 넘어섰고 벨기에와 스페인의 국방비는 GDP의 각각 1.3%와 1.2%에 불과한 수준이다. 핵보유국으로 유럽 안보의 양대 축인 프랑스와 영국의 국방비도 GDP의 각각 2.06%, 2.3%로 나토 목표치를 살짝 웃도는 정도다. 유럽 본토에서 전쟁을 겪고 있지만, 미국(3.38%)보다 1%포인트 넘게 적은 돈을 국방비로 쓰고 있는 것이다. 국방비가 GDP의 3%를 넘긴 국가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4.12%)와 에스토니아(3.43%) 정도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수십 년간 국방비 부담을 줄여온 유럽에 잊고 있던 안보 불안을 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국가에 국방비 3%를 요구한 데 이어 5%까지 늘릴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국방비를 늘리지 않을 경우 나토를 탈퇴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위협도 뒤따랐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러시아의 추가 침략에 대한 우려도 유럽 국가들이 속속 복지 예산을 헐어 국방비 늘리기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이의 일환으로 EU는 지난 1일 결속 정책 예산 활용 범위를 방위산업 등으로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결속 정책 예산은 7년 단위로 편성되는 EU 공동예산 가운데 경제·사회·지역 격차 해소 목적으로 각 회원국에 할당·지원되는 돈인데 이 자금을 방위 산업 생산 역량 강화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앞서 EU는 회원국들의 국방비 증액을 촉진하기 위해 EU 재정 준칙 예외조항도 발동하기로 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회원국에 국방비를 GDP 5%까지 올릴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어지는 반발…갈 길 먼 군사자강=EU와 나토가 뒤늦게 군사비 증액에 나섰지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로이터통신은 EU가 결속 정책 예산 사용처 관련 법을 개정해도 각국이 예산 사용 결정 시 방위 문제보다 에너지 부문, 주거난 해소 등을 우선순위로 둘 수 있어 실제 얼마만큼의 국방자금 조달 효과를 낼지는 추정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특히 저성장 속 국방비 증액을 위해서는 기존 복지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그동안 유럽 국가들은 탈냉전 이후 국방비 지출을 줄여 생긴 재정 여력을 연금, 보건, 사회보장 등 복지 정책 확대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1991년 이래로 국방 예산을 GDP의 2% 아래로 유지하면서 약 1조9000억 유로를 절약했고 이 자금으로 무료 대학교육과 의료·연금 혜택을 제공하며 복지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방비 증액에 대한 반발은 특히 고령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거세다. 유럽에서 65세 인구가 가장 많은 이탈리아(24%)는 국방비를 GDP의 2% 넘게 올리기는 어렵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 달성 시점도 2028년으로 제시해놓은 상황이다. 이탈리아 국제문제연구소(IAI)의 외교 정책 프로그램 책임자 레오 고레티는 “국방비를 2%를 넘어 3%로 인상하는 것은 이탈리아에 엄청난 일”이라면서 “인구 통계적 추세로 볼 때 의료 및 연금의 급속한 증가가 불가피한 상황이라 국방비를 늘릴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유럽 내 경제 대국인 독일 역시 국방비 증액이 쉽진 않은 상황이다. 독일이 국방비를 GDP의 4%로 늘리기 위해서는 연간 400억 유로를 추가조달해야 하며 이는 프랑스의 연간 국방 예산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또 국방비를 GDP의 5%로 올리는 예산은 현재 독일 정부 예산의 42%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즉, GDP의 5%로 국방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기존 재정 지원 절반 가량이 중단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반발은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실제 독일에서는 극우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과 급진 좌파 정당인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이 무료학교 급식 등 새로운 복지와 군사지출 축소를 내걸고 지방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복지 예산을 줄여 국방비를 늘리겠다는 움직임이 자칫 유럽 내 극우 열풍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 빈곤 퇴치 네트워크(EAPN)는 지난 1월 성명을 내고 “EU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복지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국방비 확대보다 사회 지출을 우선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WSJ는 “총을 버터로 바꾸는 건 쉽지만 그 추세를 역전시키는 것은 어렵다”면서 유럽의 국방비 증액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혜진 기자 best@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