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의 뿌리를 찾아서>(17)경주 남산①약수골∼포석골

바위마다 부처 깃든 극락정토

경주 남산은 산이 아니다. 거대한 박물관이다. 높이는 서울 남산의 두배쯤 되는 산에 유적이 무려 466개나 몰려있다. 옛 절터가 128개, 불상이 100개, 탑 유적이 72개가 된다. 개중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산행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너지고 풀숲으로 덮여져 있어 가이드 없이 혼자 찾아 나섰다가는 길을 잃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마침 경주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에서 남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앞두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적을 중심으로 매월 답사를 떠나고 있었다. 10일은 그 마지막 날. 이번 경주남산 답사의 첫 코스로 삼았다.

일행은 경주교도소 부근에서 약수골을 따라 오른다. 남산은 골짜기가 44군데나 있는 특이한 산이다. 어느 골짜기나 유적이 남아 있고 탑골 장창골 천룡골 삼릉골 포석골에는 30개 이상씩 몰려있다. 약수골 초입에서 금오산 정상(468m, 고위산과 함께 남산을 이루는 봉우리)까지는 2km 가량 된다.

키 낮은 소나무가 빽빽한 숲 사이로 산길이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중턱에 이르러 갑자기 가팔라진다. 답사지도를 맡은 최민희씨(신라문화원 전문위원)가 일행을 모아놓고 조릿대 숲이 우거진 계곡 산비탈을 가르킨다. 약수골 제1절터라는 안내판을 세워야 할텐데 그게 과연 바람직한 건지 고민중이란다. 알려지면 훼손될까 염려해서 하는 말이다.

제2절터는 산길에서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올라가야 보인다. 혼자서 조릿대 숲을 헤치고 나아가니 과연 10m쯤 수직으로 세워진 돌 축대가 홀연 나타난다. 너무 비탈이 져서 계단식으로 할 여유가 없었을 것 같다. 제1절터도 그렇고 왜 이런 산세가 험악하여 보이는 곳에다 절을 지었던 것일까? 돌 축대 위에 올라가 보았으면 좋으련만 너무 뒤쳐질 것 같아 곧바로 내려온다.

나중에 책을 보니 절은 서향으로 앉혀져 있었다. 바위 기둥이 비쭉비쭉 솟은 능선을 배경으로 하고 산 아래 배리 들판을 넌지시 굽어보는 고찰의 상상도는 위태롭다기 보다 평화롭다. 이 날은 비가 오락가락 해서 산 아래는 크고 작은 연봉들이 운무 속에서 넘실거리고 있다. 절 아래가 바로 서방 극락세계였다.

머리 없는 여래좌상이 맨 땅에 결과부좌로 앉아 있다. 대좌도 부서졌다. 목이 잘림으로써 돌부처의 세속적 수명은 더 연장된다. 목이 잘린 이후의 참담한 세월을 섬뜩하게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민희씨가 말한다.

머리가 잘려나간 건 지진 때문이거나 왜적 침입이 있었거나 조선시대 숭유억불책 때문이 아닌가 봅니다. 좌대에 있는 사리와 부장품을 도굴하기 위해 굴리기도 했죠. 삼도(목의 주름)까지 떨어져나간 걸 보면 누군가 머리를 뒤에서 쳤어요.

돌부처는 얇디얇은 가사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놓고 있다. 편단우견이라고 말하는 인도의 패션이다. 삼국시대의 불상을 보면 대개는 양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는 통견인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서 어깨를 드러내놓고 불상의 몸도 육감적으로 변하는 것은 불교미술사에서 하나의 수수께끼다.

그것은 중국의 영향이고 더 거슬러올라가면 터질 듯이 풍만한 인도 조각의 영향이다. 그러나 한국 불상은 전 시대 불상의 특징이었던 상징성을 잃지 않고 중국이 육체적 사실성을 끝까지 밀고 나갈 때 상징성으로 세속화를 억제하며 절묘하게 사실성과 결합한다. 그리고 얼굴에 한국인의 표정을 담아냄으로써 세계적인 불상으로 우뚝 선다. 그 절정에 석굴암 본존불이 있는 것이다.

이 돌부처는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손 모양도 항마촉지인(땅을 건드려 마귀의 항복을 받고 성도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돌부처의 살결이 너무 팽팽하고 부드러워 보인다는 점에서 조각수법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9세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좌의 상대석에 새겨진 연꽃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것을 봐도 그렇다. 오른쪽 팔과 몸 사이에 구멍이 뚫려있고, 4각형 대좌(대개는 8각형)인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남산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좌상이 기대고 있는 돌 축대 위에는 대좌의 하대석이 남아 있었고, 여래좌상 바로 앞에는 삼도의 자국이 선명한 돌부처의 목이 뒹굴고 있었다. 여래좌상의 목은 아니고 거기서 100m 더 올라가 높이가 17m나 되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대불입상의 목이라고 한다. 마애대불입상은 남산 불상 가운데 가장 크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몸은 바위에 새겨져 있고 머리는 따로 조각해서 얹는 양식이 파주 용미리 마애삼존불이나 안동 제비원 마애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자가 져서 멀리서 봐도 선명하게 보이도록 바위 전면을 장식한 굵직한 옷 주름이 인상적이다. 이같은 대불은 고려시대에 많이 나타나고 조각수법이 정형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 신라시대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뭐라 단정짓기도 힘들다. 신라 불상이면서도 틀을 깨고 있는 것이 남산의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애대불입상의 머리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발도 따로 조각해서 붙였는데 모두 잃어버렸다가 하나만 되찾아와 엉뚱한 모양으로 부착되어 있다. 그래도 발 옆에는 향로가 놓여있어 살아있는 기도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면 목과 귀가 놓였던 자리가 움푹 패여 있다. 목이 놓였던 자리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있는데 연결 쇠기둥을 꽂던 데라는 주장은 삼도에 맞뚫린 구멍이 없어 설득력을 잃었다.

요즈음은 사리함을 넣었던 자리가 아닌가 보고 있다. 머리가 놓였던 자리 뒤에는 지붕을 받치던 기둥 자리가 뚜렷이 나 있다. 이 기둥 자리의 의미를 찾자면 먼저 마애불 출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오늘 일정도 빠듯하므로 이 얘기는 다음 코스로 미룬다.

금오산 정상을 거쳐 북쪽 전망대로 이어진 종주로를 따라 간다. 그 길에서는 먼 발치에서 남산 부석을 바라볼 수 있고 처녀를 짝사랑한 노인의 전설이 얽힌 상사바위의 뒷모습을 길가에서 가까이 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포석정쪽으로 이어진 3km 가량의 계곡이 포석골이다.

조금 내려오다보면 큰늠비 절터가 있고 그 위에 탑을 밀어버리고 무덤을 조성한 폐탑지가 있다. 비탈길로 막 굴린 듯 탑의 옥개석과 옥신이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최민희씨는 이것이 남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 아래는 부흥사라는 암자가 있다.

거기서 남쪽을 바라보면 온통 바위로 뒤덮인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게 늠비봉이다. 늠비봉 정상에도 탑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산 위에 우뚝 솟아있는 탑을 그려본다. 이렇듯 남산은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종주로를 만나 내려오다 남쪽 기슭으로 꺾어지면 부엉골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선각을 하면서 바위 속 황토빛이 드러나 바위의 다양한 색깔과 어울려 운치있는 그림을 이루고 있다. 얼굴 부분은 윤곽만 남아있어 더욱 신비롭다. 너무 편안한 인상이 신라불상 전성기의 긴장감을 잃고 있다.

다시 종주로를 따라 내려오면 유느리골 마애삼체불 안내판이 보인다. ㄱ자형의 바위에 세 개의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상이고 나머지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으로 보인다. 보통 삼존불 양식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삼체불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최민희씨는 색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석가여래의 항마촉지인이 거꾸로 되어 있고 그래서 처음엔 고려불상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너무 희미해서 지나쳤던 태화을묘 9년(835년)이란 명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명문이 발견된 뒤로 양식이 좀 이상하다고 해서 고려 것이라고 못박기는 힘들게 되었죠. 이 명문을 발견한 학자는 삼체불을 동시대 작품이라고 얘기하는데 맨 왼쪽 불상은 나머지 것과 조각수법이 틀리고 가사나 대좌 양식도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전 동시대 작품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포석정 건너편 민가를 지나 감나무 밭을 끼고 동남쪽으로 가면 기암골이 이어진다. 세 군데의 절터가 흩어져 있다. 마지막 절터에 올라보니 발굴하고 파묻어두었던 탑재들이 빗물에 쓸려 드러나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탑 옥신에 새겨진 자물쇠 문양이다. 석탑이 목조 탑의 모방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목조 탑의 모방은 백제에서 먼저 시도됐으며, 신라에서는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탑이 유행한다.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면서 두 양식이 합쳐져 한국적 돌탑의 전형이 탄생한다.

폐사지에 흩어져 있는 탑재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막 깎아놓은 듯 눈부시게 희다는 점이다. 석재가 모두 화강암이기 때문이다. 화강암은 거칠고 단단해서 사암이나 대리석처럼 세밀한 조각을 할 수가 없다. 잘 다듬어 놓아도 돌이라는 강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은 셈인데 꾸미기를 싫어하는 우리의 체질과 맞아떨어지면서 차츰 한국의 대표적인 표정으로 자리잡는다. 탑에 화강암이 쓰이면서 불상에도 화강암이 쓰이기 시작한다.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남산이 통일이후 활기가 넘치던 불교국가의 신도시로 부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글·사진/오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