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茶로 읽는 東西문화>(21)영국풍 홍차문화

사람들은 자극적인 음료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모든 국민이 저마다 기호품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유럽의 경우엔 프랑스의 포도주, 독일의 맥주, 이탈리아의 커피 그리고 영국인의 홍차(Tea)가 있다. 이 기호품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국민성과 문화가 엿보인다. 중국이 원산지인 차를 처음으로 유럽에 들여온 곳(1610년)은 네덜란드다.

그 뒤 영국은 차 교역의 중심이 됐고, 1766년에는 유럽 최대의 차 소비국이 됐다. 그러면서 많은 커피 하우스(커피·차·초콜릿 등을 팔았으나 1730년경까지 커피가 제일 인기가 있어 ‘커피 하우스’라고 불렸다)와 차상(茶商)이 생기고 마침내는 영국풍의 홍차문화가 꽃피었다.

커피 하우스에 이어서 홍차문화의 기초가 된 것은 많은 명차(銘茶) 브랜드들의 존재이다. 그 대표격인 트와이닝, 포트넘 메이슨, 브르크 본드, 립튼, 해로즈 중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게 트와이닝(Twining)이다.

트와이닝 티의 역사는 창시자 토머스 트와이닝이 1706년 런던의 스트랜드가(街)에 ‘톰의 커피 하우스’를 개업한 데서 시작된다. 이 가게 주변에는 영국 법조인들의 요람인 ‘법학원’이 있었기 때문에 법조인들과 시인·작가들이 단골로 출입하였다. 주인 토머스는 그들을 위해 별실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훗날 신사들의 ‘클럽’으로 발전하게 된다. 토머스는 1717년 홍차 전문점인 ‘골든 라이온’도 개점했다. 이곳에서는 차 이외에도 커피·초콜릿·빵·버터·와인·술 등도 취급했다. 고객들은 귀족·법률가·성직자·의사·국회의원·고위공직자 등이었다.

“런던 시민은 초면 인사 때 ‘당신의 단골 커피 하우스는 어디입니까’라고 서로 묻는다”라고 1727년 런던을 방문한 한 스위스 여행객은 고국으로 보낸 편지에 쓰고 있다. 그 무렵 런던에서는 사람을 찾을 때, 그 사람의 집 주소보다도 단골 커피 하우스를 묻곤 하였다고 한다.

창시자의 직계 자손에 의해 300여년동안 이어져온 트와이닝사(社)의 역사는 영국 홍차문화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준다. 1837년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트와이닝 티는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알렉산드라비(妃), 메리비 등 역대 왕실의 차로 지정돼 사랑받았다. 1978년에는 90개국에 수출된 공로를 높이 평가받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표창받기도 했다. 오랫동안 영국 사람들은 ‘차’하면 트와이닝, 트와이닝하면 곧 ‘차’를 머리에 떠올렸다.

영국 홍차문화의 발상지는 1730년대에 문을 연 ‘티 가든’이다. 티 가든이란 차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는 런던 교외의 공원 혹은 유원지를 말한다. 커피 하우스가 실내에서의 남성들의 담론장인데 비해 티 가든은 여성들의 야외 사교장이다. 대체로 화사한 봄 4, 5월부터 8, 9월 가을 바람이 일기 시작할 무렵까지 문을 여는 티 가든은 처음에는 상류층 숙녀 신사들의 저녁 사교장이었다. 색색의 조명등이 켜진 산책길, 음악과 갖가지 여흥, 차와 식사(술은 금기였다)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차가 가장 애호되면서 티 가든으로 불리게 됐다. 특히 가장 유명한 티 가든은 ‘보크스홀’로, 봄의 도래를 알리는 개장날에는 왕세자도 참석해 런던의 화제가 되곤 했다. 티 가든은 19세기 중 홍차 중심의 사교문화가 가정에서의 ‘애프터눈 티’로 옮겨지면서 사라지게 된다.

유럽의 사교문화는 살롱에서 볼 수 있듯이 귀부인 중심으로 가정에서 발전해왔다. 영국의 ‘애프터눈 티’도 유럽사교문화의 좋은 모델이다. 사교, 아니 영국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의 주요한 패턴이 되고 있는 ‘애프터눈 티’는 19세기 중엽 공작부인 안나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상류사회의 식생활이란, 아침은 성찬인 반면 점심은 간소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만찬은 밤 8시에야 시작되는 형태였다.그러므로 안나 부인은 오후5시경 차와 과자를 먹으면서 그녀를 찾아온 부인들과 담소를 즐겼다. 그녀의 이런 습관이 상류사회 부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패션으로 퍼졌다.

잠 잘 때 이외에는 찻잔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는 ‘존슨판(版) 영어사전’의 저자 존슨 박사를 비롯해 영국의 시인,작가들 중에는 유난히 커피나 차 광(狂)이 많다. 그러나 보통사람들도 하루평균 7∼8잔의 차를 마신다. 시간에 따라 마시는 차의 명칭도 달라서 아침식사 전의 ‘얼리(Early) 티’, 아침식사의 ‘모닝 티’, 11시와 중식 때의 차, 오후 3∼5시의 애프터눈 티( 일명 ‘하이 티’) 그리고 저녁식사와 취침 전의 차 등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티’라 하면 ‘애프터눈 티’를 말한다.

‘애프터눈 티(티 파티)’는 집의 가장 큰 방에서 열리며, 화사한 날이면 정원에서도 열리게 된다. 스콘·머핀·비스킷 등 과자를 곁들인 식탁에는 그 집안과 주부의 품위를 가늠케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티 세트와 테이블보 그리고 다양한 식기들도 선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매너와 세련된 화제다.

‘좋은 취미’를 위해 만들어진 영국 최초의 신문 ‘스펙테이터’(1711∼12년경 창간)는 창간사에서 “아침식사에서 버터를 바른 빵과 차를 즐기는 패셔너블한 가정”을 독자층으로 밝히기도 했다. 발행인 리처드 수틸은 이어서 “우리 신문이 교양있는 부인들의 티 타임에서 화제가 된다면 더 이상의 영광은 없습니다” 라고 썼다.

18, 19세기 회화작품에는 찻잔을 앞에 놓고 신문이나 책을 읽는 여인상(女人像)이 많다. 당시 자본주의의 태동은 중산층의 ‘스위트 홈’을 낳았으며, 그것은 차와 독서를 즐기는 여성들을 길러냈다. 19세기 영국작가 키싱은 “티 타임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애프터눈 티’가 상징하는 담소(淡素)하고도 화려한 영국풍의 홍차문화의 풍경은 바로 이런 교양있는 여성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연출된 것이었다. 끝으로 커피와 차 광(狂)이던 ‘걸리버 여행기’(1726)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늘 차를 함께 마셨던 여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차는 우리들을 진지하며 매력있고 철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나는 당신이 교양인으로, 좋은 어머니로, 완벽한 주부로, 그리고 훌륭한 티 마니아(Tea Mania)가 되기를 바랍니다.…내 최고의 처세훈(訓)은 차와 커피를 마시는 일입니다.…좋은 인생이란 재산과 건강, 그리고 차와 커피를 마시는 일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서양사학자 이광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