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茶로 읽는 東西문화>(23·끝)노향은 다악(茶樂)을 타고…

국립국악원 공연장의 실내를 맑고 고요히 흐르던 양금이 단소와 어울려 2중주가 되더니, 여러 악기가 가세하면서 흥겹고 부드러운 타령장단으로 이어진다. 일깨워진 다심(茶心)은 그 소리를 타고 그윽이 고운 여인들에 의해 연녹색 실바람 곡선(曲線)을 그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단소·소금·대금·양금·피리가 장구, 북과 어우러져 힘차게 울렁이면 차놀이는 흥을 더해 녹향(綠香)을 뽐낸다.

그리고 모든 악기가 느리게 시작하다가 빨라지면 화(和)를 이루어 차 또한 우리 모두를 화경청적(和敬淸寂)의 경지로 끌어들인다. 행다례가 파하고 악기수가 모두 무대에서 퇴장한 뒤에도 나의 둘레에서는 육우산인(陸羽山人)의 실루엣이 거래(去來)되고 초의선사의 ‘동다송’의 한 말씀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을 서리에 씻긴 청초한 소화(素花)는 맑은 가을빛을 한몸에 담았네.”

공연장을 나서니 마주한 언덕 기슭 송림(松林)에서 미풍이 일고 있었다. 지난해 보고난 가을은 나에게 그렇게 찾아왔다. ‘차와 열린 우리악의 다리놓기-다악 페스티벌 2000’ 공연을 보고난그 가을은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웠다.

동서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문화의 높고 낮음과도 관계없이 모든 국민은 저마다의 국민적 기호품을 갖고있는 듯하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말해 보아라. 그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맞춰 보리라”라고 했던가. 프랑스인의 포도주, 독일인의 맥주, 미국인의 코카콜라에서 짐작되듯이 기호품들을 들여다보면 그 국민성이 엿보여 자못 흥미롭다.

아라비아의 ‘검은 열매’커피에서 보듯이 그 기호품들은 원초(原初)에 저마다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것들은 돌고 돌아 나라의 벽을 허물고 애음되면서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세속화’한 자본주의의 급류를 타고 그것들은 ‘상품’이 되고, 그러면서 국민적, 문화적 표상의 의미와 상징성을 상실해버렸다.

우리의 선인들은 인삼이라 하면 심심 산골을, 그리고 그 귀한 영물(靈物)에 얽힌 신선(神仙)의 설화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지니며 인삼을 대하고 있는가.

‘다반사’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차가 일상적인 음료가 된 지도 오래이다. 그러나 차는, 아니 차만은 그 본래의 상징적 의미를 잃지 않고 다양한 차 언어로서 옛날과 다름없이 우리들의 삶을 멋스럽고 풍요롭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육우 이래 그 ‘상서로운 나무’는 각별한 대접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한때는 술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서로 다투기도 했으나 그 맛은 제호(醍？胡)와 저울대를 겨루고 검소한 본성(茶性儉)은 선비 군자의 덕(德)에 비유되어 왔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차는 예(禮)에서 비롯되고 예로서 끝난다. 어디 그뿐일까. 산중 초암(草庵)에서 차를 달이는 유유자적 차중선(茶中仙)의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를 일깨우고 설레게 하는 변함없는 유토피아상(像)이 아니던가.

촌부(村婦)가 달여도 호사스럽고 정경부인이 차려도 담박(淡泊)한 차. 나는 때때로 차의 오묘한 향과 기(氣)에 취하면 공자와 노자가 저승에서 전생의 불편했던 인연을 훌훌 떨쳐버리고 화로가 담론을 즐기고 있는 풍경을 그려본다. 거기에서는 또 육우가 차를 달이고 있다. 두 분은 똑같이 그의 스승이 아니던가. 한 분으로부터는 ‘예’를 배우고 또 한 분으로부터는 ‘무위(無爲)자연’을 배웠던 것이다.

‘다경(茶經)’의 세계는 예의 세계이며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그리고 예와 무위자연은 서로 접목되고 하나가 되면서 슬기로운 ‘놀이’가 되었다. 예가 그대로 무위자연이 되고 무위자연이 바로 예가 된 ‘놀이’의 세계,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오늘도 꿈꾸는 무릉도원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왜 차를 마실까. 그리고 왜 다서(茶書)를 머리맡에 두고 즐겨 다기들을 찾아 집을 나설까. 또 왜 그토록 찻자리를 좋아할까. 차의 색깔과 향, 맛과 기(氣)에 끌려서일까. 다인(茶人), 아니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한 잔 찻 속에 무한을 꿈꾸는 이 세상 마지막의 어리석은 환시자(幻視者)일까.

검은 빛 천목(天目) 다완의 유현미(幽玄美), 비가 비켜지나간 뒤 학이 나는 푸른 비색(翡色) 하늘을 그대로 비친 고려청자 다완, 그리고 또한 조선의 담소한 백자와 분청 다완은 어떠한가.

이 모두는 차를 귀히 여기는 선인(先人)들의 거룩한 바람이 그대로 도공(陶工)들에 옮겨져 빚어낸 작품이 아니던가. 이렇듯 차와 차의 세계는 높고 세련된 미의식을 도연히 펼쳐 더욱 아름답다.

차 마시는 아취를 옛 선인은 사람 수가 적은 데에서 찾았다. 홀로 마시면 신기(神氣)가 나고, 두 사람이면 훌륭하다 하고, 3∼4인이면 취미로 차를 마시며, 5∼6인이면 그저 범범(泛泛)할 뿐이라 했다. 그러나 많다하여 나쁠 것이 무엇일까. 적으면 적은대로 많아도 또 그런대로 (영국의 애프터눈 티에서도 보았듯이) 좋은 것이 찻자리가 아닐까. 그렇게 이해하고 싶다.

그간 졸고를 위해 애쓰신 문화일보와 격려전화를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서양사학자 이광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