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본디는 ‘친구’아닌 ‘동무’였다

끝까지 영화 ‘친구’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얘기로 말문을 열고 싶다. 친구로 자라 깡패맞수로 살다가 친구로 되돌아가는, 사내들 철들어가는 줄거리가 미덥다. 수하들에게 암시를 줘 동수를 죽인 뒤 동수의 아버지와 중호, 주먹만큼 마음도 여린 그 친구가 살 길 열어주려고 함께 애쓰는 것을 고마워하면서도 차라리 동수 따라 죽겠다는 준석의 둔탁한 대사가 대미답다. 쪽 팔리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스스로 쪽 팔리기 싫듯 저 세상 친구를 쪽 팔리게 하지도 못하겠다는 속내를 웬만큼은 헤아릴 만하다.

‘친구’는 시절의 은유로 상투화하고 있다. 자막처리한다면 ‘많이 먹었지 않았나, 그만해둬’쯤 될 동수의 절명 대사는 여전히 판치는 비리세태에 대한 절망의 항의처럼 들린다. 14일자 시사저널 커버스토리가 민주당 ‘정풍 드라마’의 정동영·천정배·김태홍·추미애 의원 사진으로 다시 그린 패러디 포스터도 그럴 듯하다. 누가 영화속 주인공처럼 따라 죽어줄 수 있을 정도일지는 더 지켜볼 일이지만….

줄잡아 800만명이 봤다던가. 그런데 그 제목이 ‘친구’아니라 ‘동무’였어도 1000만명 대기록이 지금처럼 멀잖을까.

1960년대까지 골목골목에서 어울려 어깨동무하면서 놀고, 그 어깨 풀면 싸우고, 그러고는 이내 돌아서 다시 어울리던 애들은 서로가 동무였다. 나이가 제법 들어도 동무생각나는 저녁이면 부르는 노래가 ‘동무생각’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친구로 바뀌기 시작했다. ‘동무 따라 강남 간다’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로 바뀔 즈음, 동무라는 말 언저리엔 좌익의 붉은 빛이 돌았다.

공산당원들이 서로를 동무라 부른다니, 반공의 나라답게 동무는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 그런 한세대 남짓, 동무라는 말을 듣기 영 힘들어졌다. 간혹 듣게 돼도 오로지 장난이다. 지난 한시절,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서슬이 시퍼렇던 한동안처럼 나지막한 목소리의 장난기는 아니지만 입에 올리기는 여전히 못내 조심스럽다.

동무 어쩌고 한들 딱히 문제되진 않을 세상이 되긴 됐다. 그래도 어디 그런가. 말이 멀면 마음도 멀다. 힘들수록 의지하고싶은 누구를 친구라고 불러온 버릇으로 동무라 고쳐부르기가 어째 어줍고 어색하다.

‘인민’도 ‘동무’에 못지않다. 1948년 헌법을 제정할 당시,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확정되기 직전이던 그 시절 이맘때 제헌국회는 헌법초안의 ‘인민’을 ‘국민’으로 고쳐썼다. 그때의 초안 전문은 ‘반만년의 광휘(光輝)있는 문화적 전통에 빛나는 우리 조선인민은…’으로 시작됐고, 초안 제1조도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이 초안 전문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고친 후에도 잠시 ‘조선인민’운운은 그대로였다.

아니나 다를까, 초안을 다듬던 제헌국회 본회의 독회에서 윤치영의원은 이렇게 쏴붙였다.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어째서 그런 말을 쓰려 했는가, 사상이 의심스럽다.” 역시 그랬다. 그후 오랫동안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한마디면 변명하고 말고 할 계제가 못됐다. ‘친구’나 ‘국민’이라 해도 누군가가 ‘동무’나 ‘인민’으로 듣지 않았을까 걱정해야 했다. 참으로 어지간들 했다.

제헌국회의 유진오 헌법기초위원도 이렇게 털어놓았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1992). 그렇고 그런 사연의 헌법전문 첫 구절 ‘…우리 대한국민은’의 법제처 영어대역은 ‘We the people of Korea…’. 곧이곧대로라면 ‘피플(people)’이 ‘국민’아닌 ‘인민’인 줄 다들 잘 알지만, 아는 대로 말해도 무방한 세상이 아직 아닌가 보다.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인 오늘도 남북의 ‘친구’들은 다툼도 믿음에 못잖은 정이던 ‘동무’시절을 잊은 채 ‘민족’과 ‘통일’을 더 크게 말한다. 너나없이 얼마를 더 기다려야 동수나 준석만큼 철이 들까.

<홍정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