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지성>(5)‘한국 현실’ 토대 개념화·이론화 먼저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신기욱 (41)교수는 미국 사회학계의 주목받는 역사사회학자이다. 지난 8월 40대초반 젊은 나이에 스탠퍼드대교수겸 아-태연구소 한국학 프로그램 초대 책임자로 전격 스카우트된 것도 화제를 뿌렸지만, 무엇보다 한국 식민지 문제에 대한 연구성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본 식민주의의 긍정적 영향에 주목하는 미국의 연구경향, 이와 반대로 식민지 경험의 중요성을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치우쳐 있는 한국학계의 분위기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연구로 국내외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또한 기존 식민지 역사가 주로 엘리트 중심으로 서술돼 있음을 지적하고 아래로부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주장, 한국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는 패러다임과 연구 시각을 바꾸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사례 연구를 통해 보편적인 이론을 끌어내는 일, 즉 보편과 특수의 딜레마를 학문적으로 풀어내는 쉽지 않은 일에 매진해 왔고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신교수와 e메일 교환및 전화 인터뷰를 통해 한국 지식사회의 학문적 식민성 극복과 한국적 사회이론 정립을 위한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탠퍼드대에서의 첫 학기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UCLA에서 스탠퍼드대로 옮긴 지 벌써 넉달이 됐네요. 사회학과 교수이자 국제학 연구소의 선임연구위원,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의 한국학 프로그램 총책임자로 바쁘게 지냅니다. 스탠퍼드대의 유일한 한국 전문가이다 보니 ‘미스터 코리아’로 불리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2주에 한번씩 하는 코리안 런천 세미나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아요.”

―스탠퍼드대의 학풍은 보수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 개인성향보다 보수적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미국의 대학이란 학문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곳이라 제 연구에 제약이 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사회학자이자 한국 전문가로 연구활동을 하며 뼈저리게 느낀 것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저같은 한국학자나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의견이 별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보다는 주로 동부의 보수적인 연구소, 스탠퍼드대의 후버연구소나 국제학연구소의 영향력이 크죠. 실제로 스탠퍼드대엔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비롯해 전직 고위관리들이 후버연구소나 국제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몸담고 있으며, 정치학과 교수인 라이스 현 안보담당보좌관 등은 부시 행정부의 브레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조건을 잘 활용한다면, 한국학계나 한국계 미국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이를 미국의 정책에 반영시키는 데 유리하겠다는 판단도 있습니다.”

―학생으로 혹은 교수로서 그동안 몸담았던 미국의 대학들은 한국의 대학과 어떻게 다른가요.

“워싱턴대,아이오와대,UCLA는 공립대학으로서 그 지역 주민의 고등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며 대학과 주민의 유대관계가 아주 돈독합니다. 스탠퍼드대의 인적·재정적 자원을 보면 오늘날 실리콘 밸리를 만든 저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학은 젊은 학자들이 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반면 박사학위를 갓 마친 젊은 학자들이 연구의 생산성이 가장 활발할 때 시간강사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 한국의 상황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스탠퍼드대에는 전체 교원 중 시간강사가 1%도 안 됩니다. 거의 모두가 전임입니다. 한국 대학에선 시간강사가 맡는 강의가 무척 많고, 그들을 착취하는 구조죠. 제 소견으로는 한국의 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선 젊은 학자들이 마음놓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많은 젊은 학자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려면 정체돼 있는 한국 대학은 구조조정을 해야겠죠. 하지만, 섣불리 미국식 연봉제를 도입하는 식으로 바꾸는 것은 한국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문화적 차이가 클 뿐 만 아니라 기초가 닦이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지식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국의 지식사회는 서구이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감합니다. 유행을 잘 타며 최신 이론을 소화하는 데는 뛰어난 반면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주요 문제나 이슈에 대해 긴 안목에서 심도 있게 다루는 경험적 연구는 적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론은 자꾸 바뀌게 마련인데, 외국이론을 가져다 한국 상황에 적용시키며 검증만 하고 있으면, 학문적 종속성에서 영영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국 상황에서 출발한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한국 사회에 관한 이론화가 이루어지려면 한국 사회에 관한 경험적 연구가 축적돼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개념화가 전제돼야 합니다. 저는 최근 한국 사회가 중요한 사회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지역주의, 집단적 이기주의와 지도층 인사의 자녀 조기유학붐 등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서구 이론이 우리에게 맞는지 여부를 테스트하는 데 머물지 말고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개념화·이론화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간의 긴밀한 연구협조가 있었으면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1차자료를 보는 능력이나 전통사회에 대한 이해는 뛰어난 반면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비교적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약하고, 사회과학자들은 이와 반대죠.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공동연구가 진행된다면 한국사회를 보는 이해의 수준이 높아짐은 물론 개념화·이론화에도 큰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향후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국의 단일민족의식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살피고 이러한 의식이 일제시대는 물론 분단시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나아가 글로벌 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지를 다루는 ‘한국민족주의의 기원과 정치(가제)’를 내년에 출간하려 합니다. 또한 그간 사회과학계를 풍미한 사회혁명론이나 국가론과는 다른 한국 사회변동론을 제시하는 책도 쓸 계획입니다.”

―스탠퍼드대의 한국학 프로그램은 어떻게 운영할 계획입니까.

“기존 미국 대학의 한국학연구소들은 교수 중심이며 한국 관련 강의나 세미나가 주된 활동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연구소, 즉 전임 연구원이 있는 연구소는 아직 없습니다. 스탠퍼드 한국학 프로그램은 장기적 프로젝트 중심으로 박사급 전임 연구원이나 대학원생이 주축이 되는 연구 중심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또한 학자뿐만 아니라 기업인 관료 정치인 언론인 등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여 토론하고 정책제안을 하며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장도 만들고, 한·미간 또는 북·미간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 계획입니다.”

/정희정기자 nivose@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