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남일의 80년대 문학의 갈피를 들추며>광주항쟁과 살아남은 자의 문학

학살이 끝났다. 도시는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사람들은 말을 잊었다. 살수차만 분주히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시도때도없이 핑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걸음을 멈추었다. 시커멓게 그을은 빌딩 너머로 하늘은 푸르렀고,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버린 광주”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있었다.

창작과비평사에 근무하던 시인 이종욱은 마침 처가가 있는 광주에 내려와 있었다. 5월 25일 그는 금남로에서 빨간 잠바를 입은 시인 박몽구를 본다.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복학한 박몽구는 시민대회 사회도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잡히면 총살형”이라고 생각했다. 항쟁 후 서울에 올라온 이종욱의 뇌리에는 박몽구의 빨간 잠바가 삼삼했다. 하지만 박몽구는 살아남았다.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도청 앞에서, 금남로에서, 그리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항쟁의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 기록은 일본으로 넘어가 진보적 잡지 ‘세계’지에도 실렸다. 박몽구는 서울로 달아났다가 이듬해 체포, 구속 수감된다.

살아남은 문학청년 조진태는 9월 ‘일어서라 꽃들아’라는 자신의 시를 유인물로 만들어 뿌리다가 체포당한다. 포고령 위반. 그는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그렇게 만회하고자 했다. 살아남은 문학청년 고규태에게는 징집영장이 떨어졌다. 하필이면 카투사. 동두천에 배속된 그는 미국 항공모함이 고립무원의 광주를 도우러 왔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더 이상 은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미군 군복 대신 트레이닝복을 입고 병영 생활을 해나갔지만, 그런 반항으로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한국군으로 복귀시켜 줄 것을 자청했다.

살아남은 광주의 문학청년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서울의 많은 문학청년들은 어두운 고문실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채광석:서울대 늙은 복학생. 관악경찰서를 거쳐 합수사, 수방사, 안양 계엄사를 전전하며 매일같이 얻어터졌다. “일어서 징역까지 살고서도 아직 정신 못 차렸어/ 이 개새꺄! 너 이 새끼 장간 들었어?/ 행여나 하고 예, 아이도 하나 어쩌구 하는 순간/ 또다시 검은 장갑은 미친듯이 춤을 췄고/ 완전히 뻗어 버린 내 등덜미에다 그 새끼는 오금까지 박았다”(시 ‘검은 장갑’ 중에서)

황지우:시인. 서울대 복학생. 합수사에서 줄창 얻어터졌다.

김영현: 군인. 연대 보안대를 거쳐 강릉 영동공사(보안대)로 이송. 보름동안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보안대로 끌려가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증거처럼 그것(자청한 군종사병 자리)을 달고 다녔다. 식사때마다 열렬히 기도를 드리는 것은 물론이었다. 나와 함께 끌려간 후배는 강인하고 혁명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내였는데 그 역시 눈문을 질질 흘려대며 기도를 드렸다.”(소설 ‘별’중에서)

안재성:6월 3일 서울 종로 시위가 프락치의 신고로 무산되면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수배되었다. 경찰이던 이모부의 설득으로 춘천경찰서에 자수했다. 그때부터 80일간, 가을이 올 때까지 계속된 구타와 고문에 등뼈와 귀가 “작살났고” 조사가 끝나자 곧바로 강제 징집되었다.

“그해 5월 나 광주에 있지 않았다/ 나 논에 있었다 낫 들고 밭에 있었다/ 그해 5월 나 광주 정말 모른다/ 그해 5월 몸서리나는 총소리 탱크소리/ 두 귀 막고 그냥 벙어리처럼 모만 심었다/ 황토물 핏물 송장 썩은 물 뒤범벅/ 텃논에서 못줄도 없이 아무렇게 막 모냈다”(홍일선의 시 ‘5월논 5월밭’ 중에서)

학살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 광주에서든 합수사에서든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들판에서든 살아남은 자들의 문학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