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이 다시 만난 노대통령

모처럼만에 입은 명주바지 허리띠와 대님을 바싹 졸라맸다. 입술까지 말랐다. 아무리 베테랑이라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내가 청와대 11번 게이트에 도착한 것은 19일 오후 4시 45분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타고간 아반떼는 일말의 점검도 없이 관저앞까지 스윽 미끄러지듯 들어갈 수 있었다. 관저 정원에서 KBS촬영팀의 지시를 받았다. 5시 정각 노무현 대통령은 빨간 넥타이를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대문에서 영접해서 관저로 같이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나와 정원을 산책했다. 물론 이것은 KBS의 연출에 따른 것이다. 이 장면들을 편집용 커트로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과정이 단 한번의 엔지도 없이 그냥 진행되었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진행시키자는 분위기였다.

나는 대화장소로 가기 전에 왼켠의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몸풀기 위한 티타임이었다. 권양숙 여사가 우리를 호스트했다. 언제 보아도 소박한 권여사의 단아한 품격이 돋보였다. 앉자마자 우리의 대화는 삼봉 정도전에게 돌아갔다. 노대통령은 말문을 열었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혁명가가 되려면 다음의 세가지 요건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고, 반드시 비장하게 죽어야 하고, 반드시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야 합니다.”

盧 "국정 힘들지만 해결할 자신있다"

“정치가는 일차적으로 정치행위의 결과에 의하여 평가받을 뿐이니까요. 우리 사상가가 생각의 체계에 의하여 평가받는 것과는 다르죠.”

“MBC강의 속의 정도전은 도올선생님의 해석이 만들어 놓은 작품이 아닙니까?”

“해석이 날조는 아닙니다. 반드시 역사적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그렇겠죠.”

5시 35분 드디어 응접실에서 녹화가 시작되었다. 지난번 홍석현 중앙일보회장과의 대담 때 슬리퍼 신은 모습이 영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우리는 구두를 신기로 했다.

“홍석현회장님을 너무 칙사대접했다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는데 오늘은 제가 도올선생님을 황제로 모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굽이굽이 노대통령은 유머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 한 30분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였다. 안연길 비서관이 엔지를 놓았다.

“사모님께서 모니터를 보시고 다리를 너무 벌리고 앉아계신 모습이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노대통령은 투덜거렸다.

“그게 내 앉는 버릇인데. 편하니까 그렇게 앉는 거겠지.”

나는 그때 잽싸게 직격탄을 쏘았다.

“아니, 다리를 너무 벌리면 가랭이가 보이니까 흉하다는 거 아닙니까?”

대통령의 ‘가랭이’운운, 이렇게 대화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난 인간 노무현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늙은이가 젊은이를 보면 버릇없게 보이고 젊은이가 늙은이를 보면 본받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시대착오적 존재로 보입니다. 그런데 노무현은 역시 버릇없는 젊은이의 이미지만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벌써 손녀도 보신 할아버지신데….”

도올 "정치가는결과로 평가받는 존재"

“도올선생은 뭐든지 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 오판하시는 것도….”

우리의 대화는 열을 받기 시작했다. 정말 재미있는 클라이막스로 치달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귀에 “지지지익…”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사람이 녹화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대통령은 열변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에 장내의 아무도 그 소리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귀엔 분명 어떤 전기장치의 합선이었다. 순간 난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다. 소리쳤다.

“엔지를 놓아야겠습니다. 기술팀 체크해 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노대통령 뒷켠에 있는 조명라이트가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난 조크를 한마디 했다.

“우리가 열받기 전에 저 놈이 먼저 열받아 버렸네요”

노대통령은 나의 조크를 되쳤다.

“저거 국산입니까? 우리 어렸을 땐 응당 그렇게 물었겠지요.”

평생 조명을 전문해오신 KBS기술팀 노장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평생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하필 이 순간에….”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청와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마도 그 분의 인생이 작살났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를 가는 작업이 조용히 진행되었을 뿐이었고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변한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의 열기를 우리의 대화는 결국 회복하질 못했던 것이다. 나에겐 평생의 한으로 남을 엔지였다. 2시간 10분이나 녹화를 떴고 우리는 만찬에 들어갔다. 만찬 중 난 WTO 쌀 개방문제와 새만금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갔다. 노대통령은 간곡히 말했다.

“도올선생님 말씀처럼 갯벌도 살리고 전북도민들에게 복리를 가져다 주는 새로운 방안이 분명히 있겠지요. 대통령이 이래라고는 말못합니다. 그러나 ‘됩니다’라고는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랏일 매사가 그렇습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난 노무현대통령을 취임50일 때 만났다. 그때 비하면 노무현은 국정 전반에 퍽으나 깊이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난 그의 꿈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자신있는 미래를 펼쳐나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