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남일의 80년대 문학의 갈피를 들추며>“이 잔바리들아, 힘내서 써!”

80년대는 엄숙했다. 요즘에는 그런 엄숙주의가 심심치않게 조롱을 받는다. 한국문학의 문제점이 그런 전통을 이어받아 결국 “역사에 저당잡힌”(왕은철) 꼴이 되었다거나, 그 시대를 대표했던 작가들의 근작에 대해서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김형중)라고 비판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무겁게 살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많은 문인들에게 그 시대는 어쩔수 없이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함께 거친 파고를 헤쳐왔던 벗들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채광석. 1948년 7월 11일 생, 1987년 7월 12일 몰. 서른아홉 생을 딱 하루 더 넘겨 살다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많은 이들은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당장 그 입에서 어떤 말이 터져나올지 익히 짐작한다.

“쓰벌, 무슨 놈의 저당이야 저당은?”

그는 독설가였다. 어찌나 입이 걸었던지, 나중에 그의 묘소를 찾아갈 때마다 지인들은 그에게 들었던 육두문자를 되돌려주곤 했다. 하필이면 죽은 날이 쇠뿔도 녹는다는 한여름이오, 하필이면 묻힌 곳이 깎아지른 산비탈 꼭대기이니…. 그렇지만 그의 독설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선후배가 내남없이 넘나들 수 있도록 조정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인물이 바로 젊은 평론가 채광석이었다. … 내 나이보다 일곱 살 아래이고 또 그만큼 젊은 패보다 연상인 그는, 젊은 패의 좌주(座主)요, 이념적 대변자로서 능란한 달변과 특유의 독설로 늘 좌중을 사로잡곤 했다.(현기영, ‘그리운 망년우’에서)

80년대라는 엄숙한 시대적 현실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결코 피한 적이 없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재창립, 문화운동의 연대, 민중문학의 이념 정립, 그리고 재야운동과 어깨를 결고 나아가는 문학운동 전선 구축 등. 그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만났고, 불러냈고, 몰아세웠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독설은 그때마다 탁월한 위력을 발휘했다.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를 발굴한 것도 그의 업적이었다. 그 이후, 민족문학의 주체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을 때,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민족의 진정한 해방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상황에 기생하여 그들에게 남겨진 단물찌꺼기에 빨판을 박고 자기현시, 자기최면, 자기기만, 자기 카타르시스, 신선놀음, 사적 고통의 과시에 매몰되었던 … 식민지 매판지식인들의 시를 결코 참시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시를 생각한다’)

6월항쟁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애정을 지녔던 자기 사무실 근처에서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 후, 특히 후배들은 한동안 정신의 어떤 공백기를 경험해야 했다. 그의 빈 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한 사람이 살다간 빈 곳 메우기가/ 이렇게 힘드나 보다./ 그 욕설하던 폼조차 그리움이 되다니”(김영현의 시, ‘채광석형 묘소 다녀오는 길’)

요즘처럼 부박한 시대, 생이 더없이 남루하고 문학을 하는 의미조차 선뜻 그 가닥이 잡히지 않을 때, 벼락처럼 쏟아지던 그의 육두문자가 새삼 그리워진다.

“이 잔바리들아, 힘내! 힘내서 쓰고 또 써! 이 꼴 보자고 싸운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