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기자의 현장속으로>서비스 특화로 ‘할인점’에 반격

‘효율적으로 또 값싸게…’를 전면에 내세운 대형 소매점과 편의점 바람에 밀려 재래시장이 쇠락하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따뜻한 서민적 정감이 흐르고 지역의 풍물을 옹골차게 담아왔던 지역 시장들의 위기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일부 지역시장들은 심각한 소비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지난해보다 매출이 절반 이상 격감했고 국제통화기금(IMF)상황 때 이상으로 어렵다며 아우성치고 있다.

해방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지역의 큰 시장들은 뼈대만 남기고 모든 것을 다 바꾸는 변신을 통해 활로를 개척해나가고 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손님이 많아 가만히 서있어도 떠밀려갈 정도였다는 광주광역시 양동시장은 호남 재래상권 1번지.

“요즘은 이 골목을 보아도 손님이 없고, 저 골목을 보아도 손님이 없어요. 그전에는 한달에 두 번 쉬었는데, 요즘에는 손님을 다른 곳에 빼앗길까봐 가을과 겨울 시즌 6개월 동안에는 휴일도 없이 장사를 합니다. 그래도 내가 검은 것을 희다고 해도 손님들이 믿을 정도로 오랫동안 정직하게 장사를 해온 덕에 멀리서도 단골손님들이 찾아주고 있어 그럭저럭 먹고 살지요.”

양동시장에서 50년 넘게 마포와 모시, 포목점을 해온 백정옥(79) 할머니는 경기침체속에서 이 곳 상인들은 옆 비단 가게에 아는 사람을 소개해 팔아주고 내집에 없는 것은 옆집에 소개해주는 등 오순도순 도와가며 산다고 말했다. 작은 ‘협동의 경제’가 재래시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백 할머니 가게 부근에 위치한 한복집인 귀부인주단도 명절이나 혼수철에 제주도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지의 단골로부터 한복 주문이 이어지고 있어 불경기를 극복하는데 한 몫 하고 있다고 밝혔다.

양동시장에서 직선거리 3㎞ 부근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이 옆자리에 E마트를 개장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등 할인점이 지방상권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도 홍어와 채소 등의 품목에서 전국적으로도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는 양동시장은 나무기둥을 쇠빔으로 바꾸고 골목 지붕을 아케이드 형태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상권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광주에서 88도로를 타고 3시간20분정도 달려 대구에 닿았다. 대구의 서문시장은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의 국제시장과 비견될 정도로 큰 시장이며 조선시대 3대 향시(鄕市)중 하나였다.

서문시장도 할인점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예전 같으면 서문시장 점포 하나를 얻으려면 5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요즘에는 여기저기에 빈점포가 눈에 띈다는 것이 시장 상인들의 얘기다.

서문시장은 기존 재래시장의 이미지를 탈피, 시장 현대화와 서비스 개선을 이루기 위해 톡톡튀는 각종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

시장 한 복판에 마련한 만남의 광장에는 인터넷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방, 깔끔한 분위기의 고객 휴게실, 유아 놀이방 등을 갖췄다. 한달에 1500~2000명 정도가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관광안내소에 영어 통역 안내원 1명과 중국어 통역 안내원 1명씩이 배치돼 시장의 구석구석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최근 완벽한 냉난방장치를 갖추고 시설을 현대화하는 리모델링을 했지만 이 보다 중요한 것은 재래시장의 만성적인 불친절과 물품의 교환, 환불 등의 분쟁을 시급히 해소하는 서비스 혁신입니다. 앞으로 시장내각 지구 번영회별로 친절매장을 선정하면 상가연합회가 친절매장 표지를 전달할 계획입니다.”

서문시장 상가연합회 배용근(53)회장의 말이다.

서문시장은 고객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택시를 타야하는 등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시장 퀵 서비스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시장 직영으로 퀵 서비스팀을 만들어 전화번호와 주소 등만 기재하면 문앞까지 짐을 배송해준다는 것. 고객들이 많은 물건을 사도 홀가분하게 빈 몸으로 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서문시장의 구상이다.

“재래시장에 젊은 엘리트들이 유입돼 아이디어 제품 개발 경쟁이 불붙어야 서민경제도 살고, 청년 실업난도 줄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각 코너별로 세분화해 사과를 하나 팔아도 성주, 경산, 청송 등 현장을 다니며 어떤 집 사과가 독특한가를 파악한 뒤 특색있는 상품을 선정해 판매하고, 정전기가 안 일어나는 옷 등 차별화한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대량상권에 맞서 서문 시장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최적의 방안입니다.”

서문시장 1지구에 위치한 성신상사 박노철 (57)사장은 섬유제품 등의 경우 대구에서 생산된 제품이 가장 좋은 제품인데도 서울의 시장을 거쳐 전남이나 충청도 등지로 흘러가고 있는 상권의 서울집중현상을 개탄했다.

700여개의 아동 및 의류매장이 집중된 대구 동산상가.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으로 북적대는 등 매장 전반에 활력이 넘친다.

동산상가 700여개 점포 가운데 세대교체를 이룬 점포가 80%이상이다. 미술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부모님 가게를 물려받은 30대후반의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3층 오렌지 매장은 산뜻한 인테리어로 점포를 리모델링해 촌스러운 시장이 이미지를 탈피하고 고급화에 성공했다.

동산상가번영회 3층 회장인 최광덕(41)씨는 “연말까지 상가 옥상에 놀이방과 고객휴게실은 물론 분수대와 노래방 설치 작업들을 완료해 고객들에게 쾌적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제공할 것”이라며 “매주 1회 상인들과 손님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요교실은 이미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패기만만한 열정이 진취적 시장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데다 해외를 돌며 최신 시장 트렌드까지 살피는 청년 군단이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동산상가의 변신은 재래시장이 헤쳐나갈 방향과 관련,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전국부차장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