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명이 사라진 날 이후

‘문명이 사라진 날’.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는 조지 W 부시대통령 재선의 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노스웨스턴대학 교수인 역사학자 게리 윌스가 지난 4일 기고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는 이 글에서 부시 재선의 날을 미국의 참된 민주주의가 사라진 날로 묘사했다. 진정한 최초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비판적 지성과 인내, 증거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과학에 대한 인정과 같은 문명주의적 산물을 이번 선거에서 함께하지 못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여기에는 선악의 2분법적인 부시행정부의 성격과 일방적 대외정책뿐 아니라 부시 지지층의 문제 등 많은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듯 미대선 결과를 바라보는 미국 지성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부시 대통령을 찍지 않은 사람들의 심정은 슬프다 못해 참담해한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그 충격으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소개될 정도다. 미국 언론은 이같은 현상을 ‘일종의 정서적 공황상태’로 설명하기도 한다.

유권자중 대다수가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찍었다는 뉴요커(뉴욕주민)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외신을 타고 들어온다. 알 카에다의 테러에 당한 뉴요커들은 부시대통령의 재선을 반대했다. 반면 테러와는 상관없는 중서부와 남부의 많은 사람들이 부시대통령을 찍었다. 그래서 뉴요커들은 더욱 답답하다. 거짓 증거에 의한 이라크 침공 등 부시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도대체 왜 미국인이라면 모르냐는게 이들의 호소인 셈이다.

시애틀의 충격을 전하는 뉴스도 있다. 이번 대선에서 주민의 82%가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시애틀 주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대선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비가 많은 이 지역의 계절적 요인까지 겹쳐 심한 좌절감을 겪고있다는 보도다. 뉴욕과 시애틀뿐만이 아니다. 워싱턴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은 물론 부시대통령의 재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오하이오주의 주도(州都) 콜럼버스에서도 이같은 소식은 들려온다.

어찌 슬퍼하는 미국인들뿐이겠는가. 부시대통령을 선택한 51%의 미국인들도 있다. 부시대통령의 승리 요인에 대한 분석이 쏟아져 나온다. 부시의 안보론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부시 살리기’가 부시 재선의 요인이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외에도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한계, 미유권자들의 무지, 민주당의 선거전략 실패 등이 거론된다. 특히 부시 대통령의 정치참모인 칼 로브의 분열주의적 대선전략이 주효했다는 지적이 유력하다.

아이러니는 미국인의 절반, 특히 지성인들이 가장 우려했던 요소들이 부시재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가 안보대통령의 선제공격과 예방전쟁론이다. 부시대통령은 9·11 테러이후 핵태세 검토보고서(NPR)와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를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냉전시대에도 예방전쟁 옹호론자들은 미치광이로 간주됐을 정도다. 미국의 석학 아서 슐레진저 2세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그런 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듯하다”고 개탄했다.

부시정권의 종교적 신념 또한 주요한 쟁점거리가 돼왔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부시정부를 ‘종교적 정부’로 보았고 부시대통령 또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라크침공을 십자군 전쟁 운운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어느 정부도 정치적 목적에 종교를 이용하거나 세속적인 일에 종교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는게 일반적 시각이다. 부시정권은 이에 반해 기독교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조직적으로 선거에 동원함으로써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부시대통령은 재선이 확정되자 제1기의 대외정책 추진을 재천명했다. 특히 이라크 전쟁과 관련, “사람들이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미국민들을 보호하는 신성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며 무슨 일이든 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어 미군은 이라크의 팔루자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시작했다. 벌써부터 베트남전 이후 최대 작전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이것이 ‘문명이 사라진 날’ 이후, 세계를 향한 부시 대통령의 첫인사다.

[[김광원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