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기자의 현장속으로>“돈벌이 보다 오가는 情이제”

전남강진의 장터 어귀에 있는 주막에서 취했다. 철철철 정이 넘치는 대폿집 분위기에 취했고, 퍼줘도 퍼줘도 결코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주모의 인정에 취했다. 강진의 장터에 자리잡은 현대판 주막인 ‘목리집’은 진짜배기 술집이다. 장날 오후 3시. 들어가는 초입부터 사람사는 맛이 물씬 풍긴다. 1000원짜리 왕대포 동동주 한잔을 시키니 얼근한 시래기국에 밥을 공짜로 준다. 점심을 걸렀고 무척 시장했기 때문에 허겁지겁 밥을 퍼넣었다. 충분히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시키지도 않았는데 인정많은 주모는 얼른 또 한그릇의 밥을 국 속에 말아준다. 마치 자기 자식에게 먹이는 것 같은 온기와 ‘찐한’ 정이 느껴진다.

“이 곳 목리댁은 골동품이야. 이 곳의 장사에는 상술이 없고 마음씨만 있을 뿐이제. 거의 사회 사업 수준이라니까.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지 누가 시켜서하는 것은 절대 아니여. 우리가 고등어니 굴, 순대 같은 걸 시장에서 사갖고 들어오면 공짜로 요리를 해주니껭… 양념값도 적지않을틴디 10원도 안받아. 점심 때도 밥을 두솥 해놓고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퍼준당께. 물론 밥값도 공짜여.”

강진 '목리집'-막걸리 시키면 밥·찌개 공짜

강진에서 태어나 47년간 외지에 살다 귀농했다는 올해 쉰 세살인 한 아저씨는 돈 한푼 없는 사람도 이곳에 와서 배를 채우고 간다고 말한다. 원래 ‘서울 인정은 오지고, 시골 인심이 푸진 법이지만’ 이 곳 목리집의 인정은 더 특별하기 때문에 인근의 각 면 지역에서 이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귀띔했다.

50년이 넘은 이 술집의 주모는 올해 예순일곱인 수더분하고 인정미가 물씬 풍기는 할머니다. 몇달전에 달아놓은 2000원짜리 외상값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한 손님이 묻자 “사람의 머리하고 남정네의 무엇무엇은 쓰면 쓸수록 좋아지기 때문”이라는 걸쭉하고 푸짐한 입담을 쏟아내 배꼽을 잡게 만든다. “저녁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기도 합니다. 하루에 막걸리 3~4박스 팔아서 남는 것이 거의 없지만 밥먹고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제.”

가난이 살려낸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남도의 주막들이다.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물질 문명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연말연시에만 밀물처럼 온정의 손길을 보내다가 그 후로는 썰물처럼 빠져버리는 도시와 달리 시골 주막에는 이웃과 이웃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인정을 나눌 수 있는 나눔의 문화가 살아있다. 새벽 시장을 찾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서 거리를 배회하거나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주점은 따뜻한 연탄불처럼 고마운 곳이다.

전주 '둥구나무집'-탁주 한주전자에 안주9가지

전주 한옥마을 근처에 있는 둥구나무집도 3~4대째 주모가 이어져온 유서깊은 주막집이다. 안방까지 사람들이 가득 들어앉아 떠들썩하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3000원인데 생굴과 북어찌개 등 기본안주가 무려 9가지다. 함께 동행한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하는 활동가 다카이 히로유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일본에서는 반찬 한 가지마다 가격을 매긴다며 진귀한 풍경을 접했다는 표정이다. 일본에 유학하기도 했던 에코페미니스트 모임인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 회원인 이윤숙씨는 일본에서는 반찬 한가지에 300엔(3000원)인 곳도 많다고 거든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웃해 있는 느티나무 집 등은 꽤 오래된 대폿집이지요. 둥구나무집을 앞전에 운영하던 할머니는 이 술집에서 세상을 버리셨는데, 그 이전의 역사는 알길이 없어요. 둥구나무집에는 아무래도 일하는 분들이 많이 오고 막걸리 몇병을 드시면 식사가 된다는 분이 많지요. 하지만 때로는 밥을 드릴 때도 있어요.” 무척 수줍음을 타는 주모도 참 푸근한 인상이다.

여수에도 시간을 거슬러간 듯 70년된 술집이 있다. 술집 한쪽에 70~80장 정도의 연탄이 쌓여있고 둥근 철판으로 된 술상이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 ‘말집’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보내는 쌀을 싣는 마차의 마부들이 찾던 곳이다. 연탄불에 구워먹는 돼지껍데기 안주가 무료다. 인근 공단 사람들이나 새벽시장에 나가는 뜨내기들, 상업을 하는 사람 등이 ‘어무이, 누님’하면서 점심 때부터 들이당짝 쳐들어온다. 1500원짜리 막걸리 몇병만 먹고 거저주는 맛깔스러운 돼지껍데기를 네댓 판씩 구워먹는 사람도 많다. 이 곳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세상살이를 들을 수 있는 사람냄새 나는 곳이다.

여수 '말집'-'연탄불 돼지껍데기 구이'무료

“한달에 이틀 정도 일거리가 생길까 말까인데 이것으로 겨우 공과금내고 먹고사는 형편이야. 근데 나이가 많다고 오야지들이 일을 안줘. 밥 챙겨먹고 버스타고 (새벽인력시장)가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버스값만 고스란히 날리곤 하지. 노숙자는 되지 말아야 할텐데라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일거리를 찾고 있어요.” 일판에서 철근도 엮고 콘크리트도 친다는 쉰여섯된 아저씨는 한 건축현장을 갔더니 제대로 왕자갈도 깔지 않고 부실공사를 해 물이 위로 차올라온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 옆에 앉은 노인도 “정부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몸이 아파 돈을 못벌어 끼니 걱정을 하면 ‘어디 아프십니까’라고 물어봐야 한다”며 “정부에 기초수급 신청을 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가도 현장을 찾아다니며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에서 순천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묻고 물어 찾아간 순천의 남원골은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주막이다. 눈물이 쑥 나올 정도로 푹 삭힌 홍어와 부침개를 안주로 동동주로 잔뜩 취기가 오를 때쯤 되자 주모가 북채를 잡았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동편제의 명인 강도근 선생에게 사사했던 주모가 부르는 춘향가 쑥대머리의 한 대목이 마음을 흔든다. 주모는 과거 마을 공동체의 신명을 돋우던 남원의 춘향여성 농악단 출신이다. 나이는 쉰일곱이지만 사실상 ‘21세기 마지막 월매’인 주모는 “판소리라면 몰라도 남도의 육자배기는 한이 없는 사람은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순천 '남원골'-푹 삭힌 홍어에 판소리는 덤

“밑바닥 인생을 헤매는 사람들이 비록 표현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지 어느 누구 하나 기막힌 한이 없는 사람이 없지요.”

그는 아침 산책을 나갈 때마다 꼭 1000원이나 2000원짜리 지폐를 쥐고 나간다. 실개천 주변을 산책하다 거리에 쓰러진 노숙자들에게 이 돈을 건네기 위해서다.

한 노숙자는 추운데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끄적이고 있는데, 주모는 아마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적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태 속에서 햇솜같이 따스한 자신의 온기와 펄펄 끓는 한그릇의 국밥을 이웃에게 나눠주는 남도의 주모들에게서 등대처럼 깜박 깜박 반짝이는 희망의 불빛을 본다.

전국부차장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