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성기자의 인물산책>“온 사회 집단유희 빠져 개인 일상은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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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다. 누구나 새해에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삶을 조금이라도 희망 쪽으로 옮기기 위해 새로운 일을 꿈꾼다. 과연 우리는 희망 쪽으로 가고 있는가. 날마다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있으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확신키 어렵다. 김우창(69) 고려대 명예교수. 어른이 사라진 시대라지만, 적어도 이 이는 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노정(路程)의 맹목(盲目)’을 일깨워줄 것 같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삶을 일궈온 이 노학자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같이 고민하고 있을 듯싶다.

지난해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처음으로 관료들과 일을 해봤다는 그는 관가 안팎에서 그 중용의 지휘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에게 병술년 새해, 여전히 걸어갈 길이 아득해 보이는 이 새해벽두에 우리의 갈 길을 물었다. 지난 5일 서울 광화문 경복궁내 고궁박물관 한쪽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조직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새해라지만, 한 치 앞도 안보일 때가 많습니다. 정치권도 그렇고, 사회 각 분야도 많은 문제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길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누구나 갈팡질팡하면서 삽니다. 대한민국의 시대적 상황을 놓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봐지기도 합니다. 굶주리면 목표가 단순해지는데 지금은 밥 먹고 사니까 남은 돈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오락가락하는 형국입니다. 우리 세대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놓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로 바뀐 것 같습니다. 이런 시절에 정말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삶의 심각성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안정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매일 전국을 요동치게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전후체제에서 한국만큼 성공적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도 드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사회를 이루려고만 했지 사람 사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정치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삶에 대한 심각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밥 먹고 살 만하고 사회체제가 자유로워지니까 이젠 한 판 잘 놀아보겠다는 풍조가 휩쓸고 있지요. 정치까지도 쇼적인 것에 너무 집착합니다. 모든 것을 흥행적인 요소로 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제 우리가 사는 일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온 사회가 흥행적 요소, 상업적 요소, 집단적 흥미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요소가 점점 강화되면서 전 사회가 집단유희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황우석 사건만 해도 과학의 일상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과학자라면 연구실에서 과학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일텐데, 전 사회를 자신에게 몰두케 하는 집단유희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한쪽에 황우석 사건을 심야 토크쇼처럼, 때로는 개그콘서트처럼 파악하는 심리기제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치권도 집단적 흥미를 너무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다 보니 정작 삶의 본모습일 개개인의 사소하고 자잘한 일상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격동하는 사건만 남아 온 국민을 휘몰아가고 그 와중에 국민 개개인의 일상은 사라져버린 거지요. 하다못해 요즘 온갖 모임의 모든 화제는 황우석이라지 않습니까. 이런 집단성이 어디 있습니다. 이 집단성 속에서 자잘한 개인의 사건과 사연은 끼어들 틈이 없지요. 아주 사적인 모임에서조차 왜 황우석 사건만으로 화제가 진행돼야 할까요. 우리 국민의 일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각 개인은 스스로의 삶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전국민이 공통주제를 가지고 모두 같이 고민하고 떠드는 세상입니다.

“사는 집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아파트, 그것도 고급 아파트를 지향하다보니 개인의 주거환경조차 마치 호텔방처럼 변했습니다. 우리집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으로 바뀐 거지요. 어디에도 개인 공간은 없습니다. 스스로로부터 소외되는 일상의 증발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정치권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뭘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정부가 언론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문젭니다. 정치는 행동이 중요할텐데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더 관심을 두다보니 정치의 심각성이 사라졌습니다. 정치 스스로 행동에 무게를 두지 않고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언론)에 더 관심을 두니, 스스로의 심각성을 훼손하고 가볍게 된 거지요. 대통령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이 전국민의 스포츠가 되는 슬픈 현실은 정치 스스로 흥행적 요소에 대한 관심 때문에 비롯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흥행도 필요하고 집단적 열광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삶이 얼마나 심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과 함께 일상성도 존중하는 균형이 이뤄질 때 삶은 보다 인간다워집니다.”

―우리 사회가 일상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일상성을 존중하는 태도와 정책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고용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경쟁에서 자유로운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보다 인간적인 마을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일상성의 기본은 동네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모든 집은 호텔화되고, 정부는 도시를 아예 새로 만듭니다. 여기에 사소하지만 각자 중요한 개인의 역사가 스며들 틈은 없습니다. 정부의 주택건설사업도 이젠 동네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좌파 우파 하는데, 내가 보기에 좌나 우나 모두 이 일상성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이 시대 자체가 정상적인 일상적 삶을 소멸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좌우파 모두 집단적 정치흥행은 있지만 개인의 일상을 보장하려는 철학은 찾을 수 없습니다.”

―제도만으로 일상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보·보수를 떠나서 전통적인 정치사상이 지향하는 것은 안정입니다. 안정이 뭡니까. 편안한 삶 아닙니까. 편안한 삶이 되려면 의식주가 우선 안정돼야 하고 이를 실행하는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제도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인격과 생각의 깊이입니다. 아무리 일상성을 존중하는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도 이를 세부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지요. 그런 제도를 판단하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지도자야말로 인격적으로 안정돼있고 성찰적인 고려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는 이야기 해보지요. 선생님댁은 생활사 박물관이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않고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나는 나쁜 소비잡니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필요없는 것은 안산다 주의입니다. 지금 입고 있는 양복도 약 20년 전에 산 겁니다. 그밖에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양복도 있습니다. 우리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은 아버지께서 쓰시던 의잡니다. 거실의 긴의자도 30년 전에 산 것이지요. 내가 쓰는 책상은 아들이 대학 다닐 때 쓰던 것이니 약 40년 됐습니다. 내가 물건을 사지 않는 이유는 필요한 것만 사는 것이 내 취미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좋은 옷을 입는 것이 취미일 수 있고 어떤 이는 레코드를 모으는 것이 취미일 수 있습니다. 단지 나는 오래된 물건을 계속 사용하며 사는 것이 취미가 되었을 뿐입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도 바쁘게 보냈는데….

“이달 말에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가 문을 닫습니다. 이 행사를 하면서 우리의 일하는 능력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기간에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나도 이 일을 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근검절약형이고 관계된 분들은 국가 홍보를 위해서 또 예술을 위해서 좀 과도한 지출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어서 그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계획은.

“이제 글도 쓰기 싫고 책도 쓰기 싫은데 정리해야 할 원고들은 있습니다. 평론집, 시에 대한 에세이, 공간에 대한 에세이 등 세권 정도 낼 계획입니다. 우리집이 25년 전에 구입한 낡은 집인데,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상당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집을 어떻게 할까 생각중입니다.”

배문성 문화부장 msba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