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신상옥 감독, 납북 → 탈북 → 망명… 영화같은 삶

11일 타계한 고 신상옥(80) 감독은 한 시대를 풍미해온 한국영화계의 거목이었다. 전후 혼란기에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영화를 잇달아 발표하며 한국영화계를 이끌어왔던 신 감독은, 아내 최은희씨와 납북과 탈북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사적으로도 마치 한 편의 영화같은 삶을 살아왔다.

신 감독은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1952년 영화 ‘악야’로 데뷔했다. 이듬해인 1953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결혼해 화제를 뿌렸다. 신 감독이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60년대 들어서부터였다. 1960년 ‘로맨스 빠빠’를 시작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성춘향’‘상록수’‘연산군’ 등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들을 잇달아 쏟아냈다. 이 무렵 그가 만든 영화는 모두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사에 시선을 맞춘 휴머니즘이 담겨 있는 작품들.

이 영화들로 그는 전후 격변기를 거친 한국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영화를 통한 계몽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 감독은 이후 ‘폭군 연산’‘강화도령’‘로맨스 그레이’‘빨간 마후라’‘벙어리 삼룡이’‘이조여인 잔혹사’ 등의 화제작을 내놓았다. 신 감독은 제작자로도 활동해 1966년에는 당시 한국최대 영화사인 신필름을 세우기도 했다. 재정문제로 1970년 문을 닫긴 했지만, 신필름은 당시 영세하던 영화산업이 기업화의 틀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한국영화의 소재개발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생산해 내는 근간이 됐다.

영화감독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신 감독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78년. 그해 1월 최은희씨가 영화사 초청으로 홍콩을 방문하던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된 것. 6개월 뒤인 7월 신 감독이 최씨의 실종사실을 전해듣고 홍콩으로 갔다가 공작원에 의해 납북됐다.

납북 후에도 그는 북한에서 왕성하게 영화를 만들어냈다. 북한에서 머물며 그가 연출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사랑 사랑 내 사랑’ ‘심청전’ ‘방파제’ ‘불가사리’등 7편의 영화는 한국 영화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불가사리’는 2000년 7월 국내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납북된 지 8년 만인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탈북후 미국에 체류하던 신 감독은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 사건을 다룬 ‘증발’등을 만들어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부인 최씨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세계 영화계 인사들과 꾸준히 교류를 해온 신 감독은 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2002년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2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2003년에는 ‘상록수’가 칸 영화제 회고전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영화 ‘칭기즈칸’ 제작의 꿈을 키우며 영화 혼을 불태웠던 그는 그러나 4년전에 제작된 신구 주연의 ‘겨울이야기’를 유작으로 남겼다. 이 영화는 그의 75번째 감독작이었으나 일반 개봉되지 않았다.

신 감독은 또 부인 최씨와 함께 2002년 1월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제작하기도 했다. 신 감독은 특히 2003년에는 안양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말년에도 후배를 양성하며 한국 영화계에 변함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