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호 시인의 축구 글발>축구와 밥솥

지난 화요일 밤 저는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있었습니다. 한국과 세네갈의 경기를 보는 중이었지요. 경기장을 꽉 채운 6만명 중 하나가 되어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파도가 밀려오면 일어나 호응도 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오더군요. ‘누가 이런 때 매너 없이 전화를’ 하고 번호를 확인하니 존경하는 부인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분의 전화는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 제가 축구장에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6만명이 소리 지르는 아수라장 속에서 무슨 통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전화는 집요하게 울리더군요. 하는 수 없이 받았습니다. 멀리서 짜증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어디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풀죽은 목소리로 “축구장”하니 “잘 한다, 밥솥은 어떻게 하고?” 합니다. 아차,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면서 전기밥솥이 고장 났으니 고치든지 새로 사든지 하라고 했는데….

이런 중대한 실수는 중상 내지는 사망감입니다. 그러나 나는 축구장에 있었습니다. 축구장은 이성의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그리고 또 마침 내 줄로 인간파도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안 들려, 나중에 얘기해.” 저쪽에서 또 뭐라고 하는데 그만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안 들린다니까!”

나중에 옆에 앉은 친구가 그러더군요. “너 미쳤니, 어쩌려고.” 물론 저도 가슴이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그때 한국의 첫 골이 터졌습니다. 우리는 일어나 소리 지르고 펄쩍 뛰느라 모든 걸 잊었습니다.

대~한민국 여기는 축구장입니다. 축구장에 있는 사람에게 밥솥 얘기를 한 아내가 잘못이지요. 그렇게 9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아쉽게도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에 밥솥이 둥그렇게 떠 있는 게 보이더군요. 나는 천국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부랴부랴 경기장 아래에 있는 대형매장에 가서 전기밥솥을 샀습니다. 그래도 밤 열시가 넘은 시간에 축구장 근처에서 밥솥을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밥솥 박스가 제법 크더군요. 혼잡을 피해 아래 정류장에서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갔습니다. 온통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나팔을 불며 꽉 채운 길을 커다란 밥솥 박스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제 모습이 이상한지 머리에 불이 들어오는 뿔을 쓴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더군요.

아내 입장에서는 당장 내일 밥해먹을 게 걱정이었을 겁니다. 냄비에 하면 보온이 안 되니 점심 저녁을 찬밥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축구장에서만큼은 고단한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은 내 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월드컵이 열리면 온 국민이 한 달 동안 열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그늘에는 장사가 안돼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탄 택시기사도 손님이 없을 거라 걱정이고 제가 일하는 출판계도 월드컵 기간 동안에는 아예 새 책 출간하는 일 자체를 미룹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거라고 불황을 타는 출판계는 참 갖가지 요인에 흔들리기도 잘 합니다. 우리나라 시합이 열리는 새벽까지 기다리면서 책을 한 권씩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도 축구는 축구입니다. 공을 찰 때는 공만 봐야 합니다. 공을 차면서 밥솥을 생각하면 축구가 미워할 것입니다.

택시기사들도, 출판계 사람들도 그날이 오면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열광할 것입니다. 그저 조금 더 바란다면 우리가 축구를 보면서 열광하는 만큼의 에너지가 모여 어려운 현실을 덥히는 온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날 밤 밥솥을 들고 집으로 오면서 마누라에게 혼날 생각보다는 왜 우리 팀이 그렇게 쉽게 실점하게 됐는지를 생각하느라 바빴습니다. 이 글을 우리 집사람이 보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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