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인물> ‘여성 장애인의 목소리’ 세계인권 수장에

이달 초 미국 뉴욕의 유엔(UN)본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공석이 된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 부판무관을 뽑기 위해 최종 후보자들을 면접중이었습니다. 대상 인물은 3명. 당초 80명이 지원했지만 서류전형을 통해 5명이 남았고, 유엔내 고위인사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는 최종적으로 3명을 사무총장에게 추천했습니다.

아난 총장은 3명을 일일이 면접한 뒤 결국 한 동양 여성을 부판무관에 임명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동안 이 여성은 ‘여성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결국 유엔은 치열한 찬반 논쟁 끝에 지난 8월 제정된 ‘장애인 권리협약’에 여성장애인 관련 별도조항을 삽입하게 됩니다.

아난 총장은 이 과정에서 이 여성이 보여준 추진력과 전문성, 협상력 등에 후한 점수를 매긴 셈입니다. 바로 한국 외교통상부에서 국제기구국장을 맡고 있는 강경화(51·사진)국장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강 국장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바로 1990년대 후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유창하게 하던 깔끔한 외모의 그 여성입니다. 강 국장은 그러나 정통 외교관료 출신은 아닙니다. 이화여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부친(KBS 강찬선 아나운서)의 뒤를 따라 방송계에 투신, KBS 영어방송 아나운서겸 PD로 사회에 발을 디뎠습니다.

이후 미 매사추세츠 주립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국회의장 국제비서관, 세종대 영문과 조교수 등을 거쳐 김 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게 됐고, 1998년 7월 외교부에 국제전문가로 특채됩니다. 지난해 7월에는 비(非) 외무고시 출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외교부 국장급(국제기구정책관)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일병 연세대 공대 교수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있습니다.

강 국장은 지난 2001년 주 유엔 대표부 참사관에 임명돼 국제외교가에 발을 디뎠으며, 2003년 3월부터 2년 동안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산하 여성지위위원회 의장(순번제)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기간에 앞서 말한 ‘여성장애인에 대한 별도조항’을 유엔 장애인 권리협약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장애인이면 장애인이지, 굳이 여성 장애인을 별도로 고려해줄 필요는 없다”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강 국장은 “장애인 중에서도 여성은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엔은 강 국장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OHCHR 부판무관은 유엔에서 사무차장보에 해당하는 고위 직급이며, 한국 여성이 이 직급에 오른 것은 강 국장이 최초입니다. 강 국장은 내년 1월부터 4년 동안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600여명의 부하 직원들을 통솔하게 됩니다. ONHCR는 인류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한다는 기본 업무뿐만 아니라 올해 새로 출범한 인권이사회 등 인권관련 기구의 활동도 전담하는 유엔의 중요 기구입니다.

‘개혁과 구조조정’이 화두인 유엔에서도 인권 분야만큼은 점점 더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 국장의 선출은 한국 외교사에 큰 성과물로 평가됩니다.

현재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수행해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에 머물고 있는 강 국장은 21일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것이 바깥에서 보는 것만큼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외로움도 느끼고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다보니 어려움도 많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선출된 기쁨’보다는 앞으로 맡을 일에 대한 ‘마음다짐’부터 밝힌 것입니다. 강 국장은 또 “앞으로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일할 기회가 많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자기가 진출하고픈 분야의 이슈를 잘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며 젊은이들의 국제기구 진출을 독려했습니다. 지구촌의 인권 가치를 한 단계씩 높여나갈 그녀의 활약상을 기대해 봅니다.

양성욱기자 feelgood@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