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길>“정치적 자주보다 문화적 자주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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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4년 동안 누적된 실정에다 정치, 경제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최근 그 어느 때보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원식 전국무총리를 지난 15일 만나 최근 시국과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파라다이스 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계신데 어떤 일을 하는 곳입니까?

“파라다이스 그룹의 창업자인 고 전낙원 회장이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13년 전에 만든 재단입니다. 시각, 청각, 신체장애, 정신지체 등 모든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특수 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개발해 수용 시설이나 일선학교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90%가 후천적으로 장애가 발생하고 특히 교통사고로 인한 뇌성마비가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국내에 180만명가량의 장애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족까지 합하면 장애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재단은 장애아 가족을 위한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들어 극복 방법을 공유하고 찾는 등 자문 기구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장과 교육부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누구보다 화려한 공직을 거치셨지만 후회스러운 일도 있겠죠?

“1995년 민선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것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으로 6공화국에서 문민정부로 권력을 넘긴 뒤에 저는 원래 교육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공직을 맡지 않고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강권에 못 이겨 마음이 약해져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야할 길, 정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실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후에 적십자사 총재를 지내고 지금처럼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6공화국 때인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당시 북한의 연형묵 총리와 함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고위급회담을 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당시 만들어진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남북 관계사에서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됐는데 이제는 완전히 형해화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8차례의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끌어 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절부터 남북 기본합의서가 굉장히 잘 된 것이라고 평가해놓고 2000년에 남북 정상회담을 하면서 그 흐름을 끊더니 지금처럼 북한에 끌려다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남과 북이 핵을 생산·운반·보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비핵화선언이었는데 지난번 북한의 핵실험은 이를 명백히 위반한 것입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가 북한에 줄 것은 주더라도 할 말은 해야합니다. 정부가 명백한 비핵화선언 위반에 공식적으로 항의해야 합니다.”

―고위급 회담 때는 남북의 총리가 무려 여덟 번이나 만났으니 감춰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당시 두 분이 무척 가까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자주 만나다 보니 사적으로 오고 간 대화나 선물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평양에서 남포로 연 총리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귓속말로 제발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군요. 팀스피리트 훈련만 시작하면 3개월 이상 벙커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당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북한이 흡수통일 노이로제 같은 것이 있었고 우리가 아무리 방어용 훈련이라고 주장해도 공격용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저도 안됐다는 생각에 노력해 보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녹음이 됐더라고요. 나중에 연 총리에게 화를 냈더니 자기도 몰래 앞자리의 정보원이 녹음을 한 것이라고 해요. 그것을 갖고 북측의 안병수 대표가 트집을 많이 잡더군요.”

―교육계의 대원로로서 작금의 교육 현실에 걱정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사학법 등 다른 문제도 중요하지만 제가 가장 걱정하고 위험시 하는 것은 전교조의 의식화 교육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편향된 의식화 교육을 하고 있어 나라의 장래가 몹시 걱정됩니다. 아이가 여덟 살이 돼서 손목을 잡고 학교에 데려가면서 모든 부모들이 당부하는 것은 딱 한 가지, 바로 ‘이제부터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중학생 때까지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상명령 같은 것입니다. 전교조는 그들 스스로 내세웠던 초심,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활동으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교 교육에만 맡기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격 양성을 위한 가정교육을 회복해야 합니다. 유대인이 전세계에 1600만명밖에 안 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우수한 문화 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것은 학교 교육이 아니라 가정교육이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녀 교육을 신에 대한 의무로 생각하고 사고력과 창의력 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입시를 위한 학교 교육에만 목숨을 걸고 있어 가정교육에 소홀합니다.”

―인성 교육이 실종된 때문인지 사소한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하거나 끔찍한 범죄가 빈발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문제점이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한층 성숙하려면 정신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공동체 의식이 없어져 큰 문제입니다. 아파트 생활을 하다 보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큰 아파트 단지마다 공동 목욕탕을 하나씩 짓자고 주장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목욕을 하면 친해져서 좋고 물도 아낄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도덕의식, 인간존중의 가치관이 실종된 것입니다. 지난번 여약사 사건을 봐도 카드 빼앗고 비밀번호 캐낸 뒤 바로 죽여서 묻어 버리지 않습니까? 도덕성을 재무장 하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이 있어야 합니다. 제도만 바꾸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장님 주변에서도 먹고살기 힘들다거나 경제가 무척 어렵다고 걱정하는 얘기들을 많이 들으시죠?

“근본적으로 나라 경제가 잘돼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유망 중소기업을 적극 지원해야 합니다. 일률적이기보다는 선별적으로, 잘 될 수 있는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조그만 기업이 전세계 세라믹 필터 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있는 예를 보면 왜 유망 기업을 키워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기업과 기업인을 격려해주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 나라의 경제적 성장과 발전은 모든 국민과 기업, 당국의 결단과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업과 기업인을 죄인시하는 풍토가 있는데 정부가 앞장서 기업을 격려하는 정책을 강력히 펼쳐야 합니다.”

―괴물이라는 영화를 무려 1400만명 이상이 관람하고 고구려 건국을 다룬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는 등 문화적으로 ‘자주’라는 코드가 뜨고 있습니다.

“정작 젊은이들에게 강조해야 할 것은 정치적, 군사적인 자주성보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 차원의 자주성입니다. 세계 어느 민족도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방대한 기록을 가진 예가 없습니다. 한글은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에 그 진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는 아직도 그 아름다움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추상화가 서양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단원 김홍도 선생이 반구상화를 그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젊은이들이 문화적 자주성을 찾는 것이 시급합니다.”

―대선이 다음 대통령 선거가 꼭 1년 남았습니다. 바람직한 지도자의 요건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 이 나라의 앞날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하겠고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의 근간이 국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인 만큼 독선적이고 분노가 가득찬 마음보다는 국민을 염려하고 보살필 줄 아는 심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경제발전에 대한 식견을 갖추고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상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돈독히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으면 합니다.”

인터뷰=이상호 전국부장 soo-lj@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