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호웅기자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일제시대와 2차 세계대전, 6·25, 4·19와 5·16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가장 가까이서 온몸으로 겪은 산 증인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쉬지 못하고 최근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강 전 총리를 만나 그의 삶과 세상사에 대해 들어 보았다.
―1961년 5·16 직후 반혁명죄로 구속된 첫번째 군 장성이었는데 당시 5·16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육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인데 중령, 대령들이 와서 군인이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장면 정부가 1년도 안됐는데 그러면 되겠느냐며 말렸습니다. 결국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군사혁명을 일으킨 뒤 저보고 육사 학생들을 동원해 지지 데모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사관생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려는 것은 안된다며 거절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일부가 군사혁명을 준비한다는 낌새는 알았지만 박정희 장군 등 주도 세력이 누군지는 몰랐습니다. 오히려 나를 포함해 족청계의 쿠데타설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당시 계급이 중장으로 박정희 소장보다 위였는데 두 분이 특별한 관계가 있었습니까?
“박정희 장군이 나이는 저보다 네살 위였지만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우리 군대 입문은 늦었습니다. 군인이 되는 과정도 저하고는 달라서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풀려나서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다 1977년에야 귀국을 하셨는데 박정희 대통령과 화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습니다.
“혁명 정국이 안정된 1962년 무렵 미국 국방부가 저를 비롯해 이한림 장군 등 반혁명 장성 4명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구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박정희 장군은 ‘강영훈이를 큰 도시에는 보내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뉴 멕시코대학으로 갔다가 이런 저런 인연으로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옮겨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15년간 미국에 머물게 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을 권유하지는 않았습니까?
“닉슨 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LA 총영사가 노신영씨였는데 ‘같이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인사를 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공부중인 학생이 정치인을 만나 뭐하겠느냐며 거절했습니다. 노 총영사가 돌아올 때 박 대통령의 편지 한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공부가 끝나간다고 하는데 이제 사회로 복귀하길 바란다’는 내용이더군요. 노신영 총영사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편지 고맙다는 연하장을 박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장문의 편지를 다시 보냈습니다. ‘사회에 다시 참여하는데 도와줄게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너무 부족하니 한국관련 연구소를 만들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고 워싱턴 D.C에 한국문제 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일본군에 들어가고 해방 후 창군과 6·25를 함께 겪었지만 5·16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됐습니다. 지금은 박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평생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북에서 월남했고… 자유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면에서 1년도 안된 장면 민주정권을 때려부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집권 후에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우리 민족사에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 기념회장을 20년 가까이 맡고 계신데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까?
“대학에 가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사립 중학교로 4학년 때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동경제대를 갈 생각이었습니다. 동경제대에 가려면 예과에 해당하는 고등학교를 거쳐야 했는데 중학교 게시판에 건국대 입시공고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모의 시험을 본다는 생각으로 응시했는데 시험관들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대학을 선전하는 좌담회를 하는데 조선 민족의 지도자인 최남선 선생도 교수로 와 있다고 하더군요. 최남선 선생이라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신 분이라는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기에 그 분의 지도를 받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대학 입학 후 인사를 하러 갔더니 ‘너희들은 절대로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한국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도 진정한 일본 사람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그후로 주일에 특별히 갈 곳이 없으니 선생님 댁에 가서 얘기도 듣고 사모님이 해주시는 점심도 먹고 그랬습니다.”
―학도병으로 참전하신 것도 최남선 선생의 권유 때문이었습니까?
“학병 문제를 선생님과 의논했더니 ‘가라’고 하시더군요. 일본이나 천왕을 위해 가는 게 아니라 조선의 미래를 위해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어 일본에 정복됐으니 너희들이 가서 군대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군대와 조직에 대해 배워라. 물론 희생은 따르겠지만 학우들의 시체를 뛰어 넘고 돌아와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주축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학교의 한국 학생들은 전부 다 학병에 갔습니다. 그때문에 선생을 친일파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일제말기 최남선 선생은 백두산 중심의 한민족 문화에 대해 강의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일본 선생들의 항의가 잇달아 강의를 빼앗겼습니다. 한국에 나와서도 민족사 분야에서는 전문가시니까 역사편찬위원회에서 고대 조선 역사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친일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셨지요?
“돌아가시기 전에 우의동, 돈화문에서 사실 때 종종 찾아 가 뵈었습니다. 그때마다 당부하신 말씀은 군대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민족이 남북한 합쳐 100만 이상 군대를 가져본 일이 없다. 민족이 합치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앞으로 우리 민족에게 과학기술이 절대로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군대가 이것을 습득하고 있다. 소총이나 전차 등등 모두 기계아니냐…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최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운동에 적극적이신데요.
“1980년 가을 김일성이 당 대회를 열어 기조연설에서 처음으로 고려연방제를 내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고려연방제란 것이 남북이 평화적으로 논의해 통일을 하자는 얘긴줄 알았는데 바로 사흘 뒤에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남북통일은 남한을 공산화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남한에서 미군을 내쫓아야 한다는 것을 명문화 했습니다. 그 규약이 변경됐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현 정권이 북한의 노동당 규약대로 남한에서 미군을 내쫓아야 한다는 전략 지침을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력이 많이 성장한데다 전시작전통제권은 언젠가는 환수해야 할 대상 아닙니까? 과거에는 오히려 군내에서 전작권 환수 여론이 많지 않았습니까?
“북한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병력도 우리보다 많고 화포도 월등합니다. 최근에는 핵폭탄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전작권을 환수하고 미군이 나간다면 국방에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미군이 언제까지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다음 정부의 성격과 대통령의 자격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4년 전에 노무현 정권이 탄생했을 때 저는 새로 나온 정치 세력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라고 봤습니다. 우리나라가 유럽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양당 제도로 돼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하면 자유와 경제발전을 강조하고 사회민주주의는 평등을 강조하고… 경제 발전으로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사회 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해서 해소하는 영국같은 체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현 정부가 포퓰리즘의 깃발을 들고 나오더군요. 포퓰리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러시아에서 농노를 해방시킨 뒤 유럽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제정 청산과 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입니다. 나중에 일부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일부는 레닌의 공산혁명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싸우지 않고 영국처럼 서로 의논하고 타협하게 할 수 있도록 번갈아 나오길 바랍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헌의 요점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 임기 5년, 국회의원 임기 4년이 안맞아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어 어떻게든 고쳐 보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지금 반드시 해야겠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당치 않다고 봅니다.”
―일제시대와 2차 대전, 6·25를 직접 겪으신 국가 원로이신데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이 맞습니까?
“그럼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아닙니까. 눈부시게 발전한 것이죠. 그렇다고 현실에 결함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한국사회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 낙후한 분야는 어디라고 보십니까?
“소련과 중국도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데 여전히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북한 때문에 생긴 사상적 혼란이 국론 분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뷰=이상호 전국부장 soo-lj@munhwa.com
■약력
1922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 육당 최남선 선생이 교편을 잡고 있는 건국대 학생으로 재학하다 학도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군 창군을 주도했고 6·25 때는 연락장교 단장, 부군단장, 육군 인사국장 등을 지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중장) 재직시 5·16이 발생했으나 참여를 거부,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돼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다. 이후 15년간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박정희 정권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1977년에야 귀국했다. 5공화국 들어서 영국(1981년) 및 로마교황청 대사(1985년)로 공직과 인연을 맺은 뒤 13대 국회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의 국무총리(1988~1990년)를 역임하고 적십자사 총재로 7년간 (1991~1997년) 일했다. 현재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직과 각종 사회단체 고문 등을 맡아 봉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군 원로들과 함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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