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릉 지나… 보문호 따라…‘신라의 밤’에 젖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보문호의 정갈한 새벽 풍경(위). 잔잔한 호수에 활짝 핀 벚꽃이 투영되면 ‘최고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흥덕왕릉에 구불구불 자란 소나무.

# 흥덕왕릉에서 만난 1200년의 사랑 이야기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2리. 흥덕왕릉은 경주와 포항을 잇는 68번 지방도로에서 샛길을 따라 들어간 작은 마을에 마치 비밀처럼 숨겨져 있다. 흥덕왕의 성은 김(金)이고 이름은 경휘(景徽). 826년 왕위에 오른 뒤 불과 두 달만에 아내 장화왕비가 병으로 숨을 거뒀지만, 흥덕왕은 끝내 다른 왕비를 맞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간곡한 상소문을 올려 “후손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왕비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청했지만 ‘외짝 새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이라며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내가 떠난 지 10년만에 흥덕왕은 숨을 거뒀고, 생전의 유언대로 아내 장화왕비와 합장됐다. 10년동안의 이별이 끝나고, 흥덕왕과 장화왕비는 죽어서 1200여년의 길고 긴 세월을 함께했다. 그 긴 시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갔을 터다.

흥덕왕릉에 들어서면 마치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선 듯한 신비감이 느껴진다. 구불구불 몸을 비틀며 자라난 수천 그루의 소나무들이 쉽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한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데, 고통을 호소하듯 온몸을 비틀고 서있는 소나무들. 그 숲은 때로 기이한 느낌마저 든다. 무덤 주위에 심은 소나무를 ‘도래솔’이라고 부른다. 죽은 이의 영혼이 도래솔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말도 있고, 저승으로 간 사람에게 이승이 보이면 남은 사람들 걱정에 편히 가지 못할까봐, 이승을 가리기 위해 심은 것이란 얘기도 있다.

도래솔을 지나면 왕릉이 당당히 서있다. 왕릉 좌우에는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문인상과 무인상이 도열해있고, 왕릉 옆에는 네마리 사자가 지키고 섰다. 무덤의 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왕과 왕비를 지키고 서있다. 세월의 풍상이 느껴지는 석상을 천천히 둘러보자.

# 봄, 아름다움의 절정에 들어선 경주 풍경

경주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바로 지금이다. 경주의 봄 소식은 이미 반월성 아래쪽 넓은 유채꽃밭으로 시작됐다. 유채가 피고 곧바로 반월성 언덕 위의 연분홍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바야흐로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주의 봄꽃이 유독 아름다운 것은, 고즈넉한 도시의 분위기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벚꽃은 경주시내 대릉원 주변에서 시작돼서 석굴암가는 길쪽으로 연분홍 불꽃이 붙어나간다.

경주에서는 보문호의 벚꽃이 가장 아름답지만, 보문호의 벚나무는 가장 마지막에 꽃눈을 틔우는데,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해 이번 주말이면 절정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자전거다. 자전거로 대릉원 주변의 유채꽃밭 길을 달리거나, 벚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보문호반을 따라 페달을 밟으면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벚꽃의 정취는 밤에도 빼어나다. 은은한 야간조명을 받은 벚꽃은 낮에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 경주의 밤에서 안압지의 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안압지는 오후 10시까지 불을 밝히고 문을 열어놓는데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조명을 받은 누각과 정자는 점점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곳곳에 피어난 진달래가 정취를 더해준다. 안압지에서 대릉원쪽으로 벚꽃길을 걷다가 만나는 첨성대의 야경 또한 빼어나다.

# 불국사보다 더 정갈한 기림사, 그리고 동해를 만나는 감포

경주에서 감포쪽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기림사는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불국사를 비롯한 61개의 사찰을 말사로 거느린 대찰이었다.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되고 말았지만,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창건된 기림사는 신라의 기원정사였다. 감은사 앞바다에서 만파식적을 얻은 신문왕이 돌아가는 길에 이 절의 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기림사에 들면 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불국사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묵은 것들’에서 나는 향취를 맡을 수 있다. 전국 곳곳에 이름난 절집들이 있지만, 경내에 들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절은 흔치 않다. 그런 절 중의 하나가 바로 경주 함월산 기슭의 기림사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오래된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적광전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단아한 법당과 가람 배치의 단정함. 고즈넉하고 고요한 분위기와 오래된 숲의 향기. 다섯가지 물 맛을 낸다는 기림사의 오정수. 경주 사람들이 기림사를 불국사보다 더 윗줄에 놓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기림사 인근에는 석회암의 자연석굴이 있는 독특한 풍광의 골굴암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 오르면 멀리 내려다보이는 동해의 감포는 경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단골로 들르는 곳. 말끔하게 개발되고, 잘 정돈된 횟집들이 들어서고 옛 포구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봄에 최고의 맛을 내는 대게며 끝물인 과메기까지 다양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이즈음 가장 인기있는 것은 참가자미회. 봄철의 가자미는 쫀득거리며 고소한 맛을 낸다.

# 경주 최씨가 가르쳐준 ‘참다운 부자로 산다는 것’

경주는 ‘신라의 도시’지만 조선시대쯤으로 건너 뛰어도 둘러볼 것들이 많다. 특히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 종택은 시간을 쪼개 다녀와볼 만하다. 지난해 11월 사랑채가 복원된 최씨 고택은 집의 겉모양보다는 ‘정신’을 봐야하는 곳이다.

최씨 집안은 조선시대 12대에 걸쳐 300년간 부를 일구면서도 칭송을 받아온 명문가. 부를 일구면서도 항상 남을 배려했고, 흉년때마다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기 위해 곡식창고를 열었다. ‘부자가 3대를 못간다’는 말은 적어도 최부잣집에서만큼은 통용되지 않았다.

최부잣집의 이런 내력은 가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1만섬 이상을 지니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가훈 하나하나에서 남을 생각하는 배려가 읽힌다.

최부잣집이 300년을 일궈온 부의 마지막도 감동적이다. 일제시대와 광복 이후 격동기에 독립운동자금과 대구대학(후에 영남대학이 된다)의 설립자금으로 모두 털어내고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왔다.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복원된 사랑채는 구한말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피신왔었고,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 수백명과 며칠 묵는 등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일본 강점기에는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 경주 서봉총 금관을 발굴하려고 왔다가 묵었고, 의친왕이 6일동안 머물기도 했다.

경주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