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뉴스> 83세 노모 “오래 산 게 잘못… 선처를”

“오빠가 먼저 어머니를 모셔야지 내가 먼저는 못 모신다”, “모시던 네가 계속 모셔라.”

13일 오전 10시 서울 중부경찰서 폭력3팀 사무실에서는 50대 중년 남녀가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들은 전날 자신들이 일하는 시장에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버려뒀다가 경찰의 연락을 받고서 찾아온 남매. 하지만 이들 남매는 경찰서에 들어서서도 밤새 버려뒀던 어머니 허모(83)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들에게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는 그저 애물단지인 것처럼 보였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전날인 12일 오후 6시30분. 중부경찰서 충무지구대에 한통의 신고전화가 들어왔다. 80대 할머니 한 분이 혼자 서울 주교동 방산시장에 버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시장 경비실 앞에 있던 허씨를 발견하고 경찰서로 모시고 왔다. 혹시 자녀들로부터 유기된 것이 아닌지 사정을 묻는 경찰에게 허씨는 “버려진 게 아니라 내가 길을 못 찾아서 이렇게 됐다”며 아들(53)과 딸(50)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줬다.

경찰은 이들 남매에게 허씨를 찾았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했지만 휴대전화가 꺼져있어 연락할 수가 없었다. 경찰은 고령을 고려해 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행려병자가 아니란 이유로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경찰은 결국 허씨를 지구대 숙직실로 모시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서 허씨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남2녀를 둔 허씨는 23년 전 함께 살던 장남이 병으로 숨진 뒤 방산시장에서 원단장사를 하는 아들과 딸 집을 몇 달씩 전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들 남매는 몇해 전부터 어머니를 누가 부양해야하는지를 놓고 자주 말다툼을 벌여왔다.

지난해 11월부터 허씨를 모시고 있던 딸 부부는 12일 오후 4시쯤 자신의 가게에서 50m 떨어진 오빠의 가게 앞에 허씨를 데려다 놓았다. 그러자 10분쯤 뒤 이번에는 아들 부부가 허씨를 여동생 가게에 다시 데려왔다. 여동생 부부는 곧바로 허씨를 오빠 가게로 데려가 “왜 오빠가 모시지 않느냐”며 크게 다퉜다.

허씨는 1시간 넘게 아들 딸 손에 이끌려 양쪽 가게를 3~4차례 오갔고 자식들의 말다툼을 보다 못해 인근 경비실 앞에 주저 앉았다. 오후 6시가 되자 다투던 아들과 딸 부부는 허씨를 버려둔채 모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가버렸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도 이들 남매는 서로 “얼굴을 보기 싫다”며 출석을 거부하다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경찰서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경찰서에 나타난 남매는 밤새 버려져있던 어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서로 부양책임을 넘기느라 말다툼만 벌였다.

남매의 다툼을 지켜보던 허씨는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인데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잘못이다. 애들은 아무 잘못 없으니 제발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경찰에 호소했다.

경찰 관계자는 “팔순이 넘은 어머니를 밤새 길거리에 버려놓고 연락도 안되게 휴대전화마저 꺼놨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없이 서로 안 모시겠다고 싸우는데 너무 괘씸했다”며 “할머니가 우선 아들 집으로 돌아가셨지만 걸어가시는 어깨에 힘이 없어 보여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경찰은 13일 이들 남매와 며느리(47), 사위(49) 모두를 존속유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김석기자 su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