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의 스포츠인생>불혹의 ‘인어’…“이젠 IOC 선수위원이 새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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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타의 탄생에 다음 몇 가지 조건이 더해진다면 더욱 극적이 된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우승, 그것도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국가대항전이라면 효과는 배가된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한계를 뛰어넘거나 하는 스토리가 있으면 더욱 좋다. 거기에 성별을 불문하고 준수한 외모라면 ‘금상첨화’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여자수영 3관왕에 이어 86서울아시안게임 2관왕에 올라 ‘아시아의 인어’라는 애칭을 얻은 최윤희는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15세 여중 3년생이었을 때 뉴델리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3관왕에 올랐다.

더구나 언니인 최윤정이 라이벌이었다. 4년 후 86년, 그가 아시안게임 2연패에 도전한다고 하자 누구나 수영연맹의 유망주 발굴 실패를 비판했을 뿐 재기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다시 섰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긴 생머리에 화사한 한복차림으로 금메달에 키스하던 그의 상큼한 미모에 온 국민은 환호를 보냈다.

요즘 표현대로라면 ‘국민 여동생’이었던 최윤희(40)도 이젠 16세와 14세짜리 두 아들을 둔 주부가 됐다. 여성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라는 새로운 꿈을 키우며 인천의 2014년 아시안게임유치에 힘을 보태기도 한 그를 지난 21일 경기 고양시 일산구 롯데백화점 7층 커피숍에서 만났다.

언니 윤정과 함께 서울 종로의 YMCA유치원에 다니던 최윤희는 유치원 예능시간에 수영을 배웠지만 발레가 더 하고 싶었다. 교습소를 찾았지만 너무 어리다며 조금 커서 오라는 말을 들었다. 언니는 수영에 빼어난 자질을 보였다. “같이 시작한 아이들이 이제 막 뜨기를 익혔을 때 언니는 25m 수영장을 왕복할 실력을 보였죠.

나는 언제 발레를 시켜주나 하며 수영은 마지못해 따라다녔어요. 근데 엄마(이경선·67)가 ‘윤정이에게 천재성이 보인다’는 코치의 칭찬에 수영에 올인, 난 ‘토슈즈’도 못 신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언니 치다꺼리용’으로 수영장을 다닌 셈이죠. ”

최윤정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고 5학년 때 배영 한국기록을 내는 등 천재다움을 과시했고 78방콕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 “나는 내성적이지만 속으로는 오기가 많았어요. 언니에게 지기 싫어 좋아하지도 않는 수영을 열심히 했어요. 나중 아시안게임 2연패를 했을 때 언니가 그러데요. ‘네가 어릴 때 나랑 레이스를 하면 이기겠다고 뒤에서 내 다리를 잡고 그랬던 것 생각나느냐’고. 그만큼 언니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죠.”

82아시안게임에 임박해서는 최윤희도 어느 덧 언니와 한국기록을 다툴 정도의 실력이 됐다. 그러나 메달 기대주는 언니였다. “내가 한국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너무 어려 다들 언니에게 메달을 기대하고 있었죠. 하지만 언니는 이래저래 부담이 컸고 나는 참가하는데 의의를 뒀을 정도로 마음 편하게 해서 좋은 성적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는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수영에서만은 서로 라이벌 의식이 강했어요. 언니는 활달했지만 연습기록이 내가 앞서면 샐쭉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언니가 비타민이라도 먹으면 따라서 먹는 등 언니 하는 건 다 하려고 했어요. 유운겸 선생님(당시 코치)이나 엄마는 이런 점을 이용해 서로 경쟁을 시키기도 했죠.

그래도 언니 때문에 사실 편하게 운동했어요. 수영 가방도 각자 들고 다녔는데 언니가 그냥 한 가방에 넣자고 해서 언니가 들어주고….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새벽 4시 반부터 수영장 훈련을 시작해 학교도 안 보내고 저녁까지 종일 훈련만 시켰어요. 풀 훈련만 하루 1만6000m나 했는데 새벽훈련을 마치고 식당에 가면 남들이 다 먹고 남긴 찌꺼기만 남아 있고….

너무 힘들어 언니랑 가방 싸놓고 도망갈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였다니까요. 막상 나가려니 갈 데가 없어 실행은 못했지만. 힘든 선수촌 생활을 하면서 라이벌이었지만 ‘동지애’까지 느낀 언니였는데…, 86을 앞두고는 언니가 없어 너무 힘들어 물속에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언니가 나 때문에 얼마나 부담감을 갖고 있었을까 뼈저리게 느꼈지요. 언니요? 요즘 늦둥이 때문에 정신없어요. 애가 아직 세 돌이 안 됐거든요.”

최윤희는 서울아시안게임 직후 은퇴했고 연세대(86학번)를 다니면서 광고모델, 방송 리포터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스포츠 스타의 본격적인 광고출연은 아마 최윤희가 처음이었지 않나 싶다. 막 선보이기 시작한 스포츠드링크 ‘포카리스웨트’ 모델을 했었는데 계약금을 슬쩍 물었더니 당시로는 강남 중형 아파트 2채 값이 넘는 1억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KBS와 일본 후지TV의 리포터로 방송국을 드나들던 그는 노총각 가수 유현상과 결혼하게 된다.

“우연인지 방송국에서 가장 빈번하게 마주쳤어요. 자상한 것에 끌려 결혼 결심을 했는데, 집에서 난리가 났어요. 엄마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 대학 졸업과 동시에 비밀 결혼식을 올렸죠. 근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혼 한 달 만에 첫 애를 임신하면서 풀어지셨어요. 요즘이요? 남편이 엄마와 더 친해요. 엄마도 나보단 사위를 더 챙기고(어머니 나이를 물었더니 헷갈린다고 남편에게 물어 본다).”

두 살 터울로 아들 둘(유동균, 호균)을 본 최윤희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시간이 나자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날 하는 고민이 ‘오늘은 누굴 만나 점심을 먹나’이런 것이어요.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고. 남편과 상의한 끝에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러다 2001년 미국 워싱턴주의 시댁에 갔다가 그 곳 수영클럽의 지도자로 일하게 됐죠. ‘킹 아콰텍 센터’라는 곳인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영장이에요. 거기 다니던 조카가 ‘숙모 정도 경력이면 지도자로 받아줄 것’이라고 해서 반 장난 삼아 지원해 봤는데 ‘당장 같이 일해 보자’는 답을 받았어요.”

수영 선진국인 미국에서 최윤희는 뛰어난 지도자로 인정받았다.“미국식과 한국식 지도방법을 혼합해서 그런지 반응이 좋았어요. 언니랑 뉴델리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미국에 수영유학을 갔는데 한국은 전담코치가 붙어 시시콜콜 간섭하며 가르치잖아요. 근데 미국은 자율훈련이에요. 엄격했던 유운겸 선생님의 품을 벗어나자 슬슬 편하게 훈련했고 결국 유학이 실패로 끝난 경험이 있어요.

미국에서도 여자 코치는 거의 보지 못했고 게다가 동양인은 내가 유일했죠. 처음 아이들을 만났더니 한 고교생이 영 미덥지 않은지 나한테 수영을 한번 해보래요. 시범을 보였더니 학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치데요. 대학원 논문준비를 위해 귀국을 결심했는데 클럽 헤드코치는 물론 학생들도 다들 아쉬워하며 붙잡더군요. 미국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았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죠.”

최윤희는 2004년 스포츠전문 외교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국비장학생에 선발돼 이듬해 미국 워싱턴대에 2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우리 때만 해도 스포츠는 춥고 배고픈 분야였는데 지금은 ‘스포테인먼트’라고 해서 마케팅 등이 굉장히 발전했어요.

앞으로도 개발될 소지가 무궁무진한 분야고. 먼 장래겠지만 IOC 선수위원을 목표로 정했어요. 지난 달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총회가 열린 쿠웨이트에서의 경험은 다소 막연했던 꿈을 구체화하는 좋은 기회였죠. 고급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더욱 공부해야죠.”

그는 최근 일산에 코리아레포츠클럽(CLC)을 열고 후진양성에 뛰어 들었다.“미국에서 가르치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고 선진 코칭법도 익혔는데 이를 토대로 ‘제2의 최윤희’를 키워내야죠. 전문선수반을 직접 맡고 있어요. 현재 배영 한국기록이 21년 전 제 기록보다 겨우 2초 앞서요. 개인적으로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수영이 너무 낙후됐다는 자괴감도 들어요.

선수시절에는 ‘올림픽 수영에서 동양인은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일본, 중국선수들이 메달을 따내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때와 같이 주먹구구식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스포츠는 과학이어야 하고 저는 그런 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이동윤기자 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