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윤의 스포츠인생>“존경받는 지도자 되려면 먼저 룰 지켜 신뢰 쌓아야”

여자선수는 여성 지도자를 싫어한다?

“우린 디지털세대예요. 근데 선배 언니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죠. 더욱이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여성 지도자는 선수를 선수가 아닌 후배로 보는 시각이 있어요. ‘난 선수 때 이런 거 다 했는데 너는 왜 못 하냐’며 야단치기도 해요. 같은 여성이지만 거리감을 느끼게 되죠. 차라리 남자 선생님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게 돼요.”

여자 프로농구 삼성의 포워드이자 지난달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한국의 전승우승을 이끌어 베이징(北京) 올림픽 티켓을 따는 데 수훈을 세운 박정은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모 프로농구팀 감독의 선수 성추행, 이 팀의 후임 감독 공모과정에서 박찬숙씨가 성차별로 탈락했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내 농구계가 술렁이고 있을 때의 인터뷰였다.

여자 선수가 인정하는 여성 지도자도 있다. “정말 멋있어 보였어요. 여성 지도자도 코트에서 멋있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어요. 정말 능력 있는 지도자라면 여성이라고 차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죠.” 역시 박정은이 그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한 선수의 여성지도자에 대한 인식을 180도 바꿔 놓은 주인공은 이옥자(55) 여자농구대표팀 코치다. 서울 무학여중 1년 때 농구공을 만진 후 지금까지 42년간 공백 없이 선수와 지도자로 농구와 연을 끊지 않고 있다. 현역시절 ‘참 예쁘게 농구 한다’는 평을 받았던 이옥자씨를 지난달 29일 강남구 논현동의 스포츠센터 올림픽콜롯세움에서 만났다.

3남1녀 중 둘째인 이옥자는 삼남매 운동선수로도 유명했다. 오빠인 이장하(작고)씨는 보디빌더로, 1973년 미스터코리아를 지냈고 바로 밑 동생이 현재 연세대 야구감독인 이광은씨다. 그런데 셋 모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기보다는 피나는 노력으로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공통점이 있다.

“큰 오빠는 홍익대 미대를 다녔는데 약골이었어요. 종로의 한국체육관에 다닌다고 하더니 어느 날 미스터코리아 트로피를 들고 오데요. 광은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사고뭉치였죠. 6학년 때 책가방을 화장실에 던져두고 놀러 다니다 하교시간에 맞춰 가방을 들고 나타나곤 했는데 한 달 만에 발각됐지요. 그 나이에 염천교까지 진출해 깡패들과 어울렸다고 하니…. 어떻든 당시 ‘왕십리의 경기’라고 불렸던 배명중에 시험 봐서 들어갔는데 오빠가 ‘애 망치기 전에 운동부에라도 넣어야 겠다’고 해서 야구를 하게 됐죠. 중학시절 한 게임도 뛰지 못한 후보였지만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훈련했고 배재고로 진학한 후 꽃을 피웠죠.”

이옥자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남산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중학은 사립인 진명에 가고 싶었어요. 근데 형편상 공립인 무학여중 시험을 봤어요.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학교에 갔는데 이름이 붙어 있어 기분이 좋아 교정을 한바퀴 돌아봤어요. 실내체육관이 있어 문을 열었는데 한 언니가 나를 보고 ‘얘! 들어와서 봐’ 하데요. 1년 선배 민혜숙 언니인데 난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해요. ‘너도 하고 싶으면 내일부터 운동화 들고 와라’는 말에 입학도 하기 전인 다음 날부터 체육관에 나갔죠. 그게 농구라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당시 제 키는 157㎝로 상당히 큰 편이었죠.”

이옥자는 스스로 ‘선생님 복’이 많다고 했다. “처음 농구를 가르쳐주신 분이 김성덕 선생님이셨는데 기본기를 아주 확실하게 배웠어요. 김 선생님이 2대2에서 한 명을 제치고 2대1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하루 종일 연습하곤 했어요. 2학년부터 주전으로 뛰었고 1978년 상업은행에서 은퇴할 때까지 항상 베스트멤버였죠.” 농구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는 그는 당시 무적이었던 숭의여고로 진학하면서 스카우트비까지 받는 유망선수로 컸다.

“엄마(남농화씨·83)가 받았는데 살림에 보태 쓰셨나 봐요. 지금도 얼마나 받았는지는 미안해서인지 말씀 안 하세요.” 이옥자는 실업팀에 갈 때 국내 최초로 드래프트를 적용받았다. “상업은행에는 ‘김추자 이후 최고의 가드’라는 황선혜 선배가 있어 가기 싫었어요. 그래서 한양대 진학을 결심했죠.” 이옥자의 드래프트 거부는 신문 사회면에 나올 정도로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근데 입학식도 못하고 상업은행으로 가야 했죠. 대학진학 건 때문에 1년간 뛰지도 못하고. 선혜 언니가 1년 후 은퇴해 곧바로 주전 가드가 됐지만…. 국가대표는 1972년 대만 아시아농구선수권(ABC)부터 했는데 1977년 신동파 코치가 20분만 뛰면 빼곤 해 그만두란 뜻인가 생각하고 이때부터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USC) 진학을 위해 접촉했어요. 영어공부도 시작하고….

근데 USC에서 연락이 왔는데 와서 테스트를 받으래요. 국가대표까지 한 나를 테스트한다는 데 자존심이 상해 있는데 마침 일본 샹송에서 입단제의가 들어왔어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유학시절 나중 NBA의 전설이 된 압둘 자바와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관계로 농구를 좋아하게 됐다는 샹송의 가와무라 사장은 나를 스카우트하러 한국에 직접 나왔어요. 2년간 샹송선수로 있었는데 월급이 국내의 4배는 됐죠.”

1979년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을 맡은 박신자씨가 ‘네가 코치를 잘할 것 같다’며 부탁하자 거절하지 못하고 귀국한 그는 10여 년간 신용보증보험 코치로 있었다. 1990년 ‘네가 맡지 않으면 팀을 해체한다’는 숭의여고 교장선생님의 협박(?)에 9년간 모교 감독을 맡았고 1998년부터 2년간 용인대 창단 감독으로 있었다.

이옥자는 2000년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 2부리그팀 후지쓰에서 연봉 2000만엔을 제의해왔어요. 환란 이후라 큰 돈이었죠. 팀을 1부 리그로 올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3년째에 1부 리그 결승까지 올랐죠.” 이옥자는 재팬에너지를 거쳐 샹송의 감독으로 간다. 이옥자의 샹송 행은 그 팀 감독이었던 남편 정지현(미쓰비시팀 기술고문)씨의 추천 때문이었다.

현역시절 스승이기도 했던 남편과는 17살 차이다. “내성적이긴 하지만 흠이 없는 분이죠. 선수 때 좋은 남자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죠. 그 분이 이혼한 후 1997년 결혼했는데 집에서 무척 반대가 심했어요. 광은이도 마찬가지였는데 몇 번 만나보더니 오히려 자기가 나서서 부모님을 설득하데요. 조승연, 신동파씨 등 농구인 50여명만 초대해 단출한 식을 올렸죠. 내 재능을 인정하고 농구 일을 하도록 전폭 지원해 줘 고맙죠. 아무튼 샹송 사장에게 ‘내가 감독을 계속하면 80%의 우승 가능성이 있는데 이옥자를 데려오면 120% 가능하다’며 추천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옥자가 이끄는 샹송은 곧바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샹송 사장은 “왜 정 선생이 이 감독을 추천했는지 알았다”며 만족했다. 이옥자는 그 해 전일본선수권 결승에서는 한국인 임영보 감독이 이끄는 JAL에게 패한다. 에이스 하은주의 부상결장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하지만 이 패배는 오히려 이옥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고 샹송 사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선수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도 지도자의 책임이다. 나 때문에 졌다”고 말했다. “난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사장이 다음 날 불러 ‘어제 인터뷰를 보고 감동했다. 일본인 감독들은 모두 선수들에게 패인을 돌리는데…’하며 눈물까지 글썽이데요. 다음해 리그에서도 우승했죠.”

이옥자는 샹송의 프랜차이즈인 시즈오카(靜岡)시에서는 혼자서 식당에 가지 못할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우승이 아니면 안 되는 분위기라 스트레스가 많았다. “마침 한국에서 여자대표팀 코치직을 제의, 5년간의 샹송 감독생활을 청산했죠. 사장은 5시간이나 설득하며 남기를 원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 핑계를 대고 뿌리쳤죠. 샹송은 올해 5위로 떨어지자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며 다시 와 달라고 했어요. 아마 대표팀 코치에서 잘렸으면 갔을 겁니다.”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 “신뢰를 쌓아야죠. 팀의 룰을 지도자부터 지키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훈련할 때는 항상 선수들과 코트에 있어야 합니다. 의자에 앉지도 말고 휴대전화도 받지 말아야죠. 그런 건 선수들에게 예의가 아닙니다. 또 모른 척해주는 것도 필요해요. 어느 선수가 훈련하기 싫어 꾀병을 부린다 합시다. 선수가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은 꾀병이라 할 수만은 없어요. 피곤하니까 그런 것이죠. 모른 척하면 돌아옵니다.”

dy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