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不信’을 넘어 ‘疏通’의 시대로>가족끼리도, 이웃끼리도 “…”

# 장면 1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모(42)씨는 최근 가족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감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얼마 전 퇴근해 집에 갔더니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얼굴도 돌리지 않고 책상에 앉은 채 “안녕히 다녀 오셨어요”라고 만하고 컴퓨터 게임을 계속하는 게 아닌가. 부인도 “다녀오셨어요”라고 한 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이와 대화하는 시간이 하루 평균 10분이 채 안되는 것 같다. 부인과는 전화통화 같은 것으로 가끔 얘기를 좀 나누긴 하지만 주제는 대부분 아이교육이나 집안문제 일 뿐, 자신들의 문제를 놓고 대화한 기억이 없다.

# 장면 2

경기 고양시에 사는 이모(여·35)씨는 얼마 전 심야 퇴근길에 지하철 출구에서부터 웬 남자가 따라오는 것 같아 불안감을 느꼈다. 급기야 아파트까지 따라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 사람은 이씨가 사는 9층에 같이 내려 옆집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이씨가 사는 아파트는 38가구가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씨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다.

◆부부간, 부모·자녀간 대화안해 = 가족간 대화부족, 이웃간의 소통단절이 어제 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양상이다. 사람들은 여가시간에 TV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는 등 가족들과 단절된 채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여성가족부가 2006년 발표한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5가구 중 1가구(21.2%)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하루평균 30분 미만이며, 3.0%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응답했다. 최소 2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비율도 41.4%에 불과했다. 함께 저녁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 가족도 14.1%나 됐다.

부부간에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배우자와의 하루평균 대화시간이 30분 미만이 20%, 30분~1시간이 33% 정도로 나왔다. 부부의 55%가 하루에 1시간 이상은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혀 대화가 없다는 경우도 1.4%나 됐다.

부모와 자녀들간의 대화부족도 심각하다. 2006년 한국교육개발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4~6학년 학생의 30.9%는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어머니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경우도 19.8%나 됐다. 대화단절은 고학년으로 갈수록 더욱 심각해, 중·고등학생의 40.6%가 부모와의 대화시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왔다.

부모와의 대화부족은 자녀들을 비행청소년으로 내몰고 있다. 2006년 서울가정법원 소년자원보호자협의회가 전국의 초·중·고등학생과 교정시설 수용경험이 있는 비행청소년 등 2031명을 대상으로 비교조사한 결과 비행청소년의 17.9%가 가족간에 대화가 전혀없다고 답했다.

◆가족의 타인화, 공동체 붕괴 = 한 집안에 살면서도 부부간, 부모-자녀간 대화부족은 정서적 안식처라는 가족기능을 붕괴시키고, 가족의 타인화·도구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대화부족 가정의 동전의 양면이 이웃간의 소통부족이다. 도시의 경우 같은 아파트 단지안에 누가 사는줄 대부분 모른다. 어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동승하게 되면 인사를 나누지 않고 어색하게 침묵만 지키고 있다. 골목길 주차시비를 벌이다 싸움이 붙어 파출소에 가보니 이웃집 사람이더라는 가십성 기사도 심심치않게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서적 위안, 마음의 평화를 얻던 가족공동체는 직장에서의 시장화, 경쟁심화에 깔려 압사직전에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 모 국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에 더해, 항상적인 해고위험에 노출되면서 아버지들은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 김선업 교수는 “한국인들의 유별난 자녀 교육열과 주택을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는 문화가 가족간, 이웃간 단절을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부모들은 자녀를 성적으로만 평가하고, 자녀는 부모를 돈벌어오는 사람으로 바라보면서 가족의 타인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이웃과의 소통단절은 비슷한 경제수준의 서구와 비교해도 유별나다”며 “집을 정착해 사는 곳이 아니라 1~2년 단위로 옮겨가는 재산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지역사회에 착근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김세동기자 sdgim@munhwa.com